[문화산책]한글을 구하라

박순원
시인·광주대 교수

박세라 기자 sera0631@gwangnam.co.kr
2016년 12월 08일(목) 16:52
래퍼 산이가 등장하는 ‘한글을 구하라’라는 공익광고가 요즘 인터넷과 방송에 자주 나온다. 세종대왕상을 배경으로 시작되는데, 경쾌하고 빠른 리듬으로 우리말이 잘못 쓰이거나, 천박하고 경박하게 표현된 사례들을 비판하면서 올바른 우리말 사용을 권장하는 내용이다. 가사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한글이 태어난 지 573년 날 때부터 썼고 죽을 때까지 쓸 말 ㄱ부터 ㅎ ㅏ ㅑ ㅓ ㅕ ㅗ ㅛ ㅜ ㅠ …… 오늘 지금 우린 어찌 쓰고 있을까? TV만 켜면 쏟아져 지어낸 말들 인터넷은 더해 씹고 버려진 한글 존잘 득템 개웃기다로 소통해 그게 요즘 대세? (중략) 존댓말조차 주인이 바뀌셨습니다. 사람보다 물건이 더 높은 세상입니다. 커피 나오셨습니다. 구하라 한글 한글 한글 한글…. 뭔지도 몰라 왜 쓰는지도 몰라 다들 따라해 그러다 보니 당연해 재밌으면 땡 이렇게 잊어버려 이러다 잃어버려 우리말 잘하는 외국사람 늘어나 한국사람 가슴속에 자라나는 뿌듯함 근데 막상 우린 어때 외국어 남용 나부터 반성 지켜야 할 사명 난 음악으로 생각 전하는 래퍼 아름다운 한글 랩하게 돼 기뻐 유네스코 세계기록 유산 훈민정음 해례본 하나뿐인 한글을 구하라”

꽤 길고 빠르게 전개되는 랩이라 잘 받아썼는지 모르겠다. 이외에도 1절과 2절 사이 한글 맞춤법이 잘못 쓰이고 있는 예들을 화면으로 보여주고 있다.

노래 중 1절 말미의 ‘커피 나오셨습니다’는 너무 자주 잘못 쓰이고 있는 말이다. 한글문화연대에서 제작한 ‘사물존대의 논리’라는 동영상에서도 ‘커피 나오셨습니다, 이 세탁기는 통이 넓으십니다, 이 차는 타이어가 광폭이시구요, 최신 모델이시거든요, 연회비 없으신 카드십니다’ 등등 엉뚱하게 사물을 존대하는 잘못된 표현을 아주 코믹하게 꼬집고 있다. 나도 우리말을 올바르게 쓰자는 취지에서 이 동영상을 매학기 학생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산이가 공익광고에서 부르는 랩은 시작부터 문제가 있다. 한글은 우리말이 아니다. 우리말을 적는 글자이다. 세종대왕께서는 우리말을 적을 수 있는 글자를 만드셨지 우리말을 만드신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 노래가사의 첫 부분 ‘한글이 태어난 지 573년 날 때부터 썼고 죽을 때까지 쓸 말’은 잘못됐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 ‘난 음악으로 생각 전하는 래퍼 아름다운 한글 랩하게 돼 기뻐’에서도 말과 글을 구별하지 못하고 있다. 말과 글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고 이렇게 무분별하게 자존심을 내세우는 것이 과연 ‘공익’인가 의심스럽다.

또 한글은 우리말을 잘 적을 수 있는 문자이지만, ‘우리말 만’ 잘 적을 수 있는 문자는 아니다. 세종대왕께서 훈민정음을 창제하실 때, 중국어, 몽고어, 일본어 등 우리 주위에서 쓰이는 다양한 언어들을 참고하셨고, 특히 중국어를 원음 가까이 표현하는 데도 무척 신경을 쓰셨다. 그 결과 한글은 표음성이 매우 뛰어난 문자가 됐다. 자음은 예사소리, 된소리, 거센소리의 3중 체계를 가지고 있고, 모음은 일상적인 대화의 말소리에서는 큰 차이를 느낄 수 없는 에, 애, 외, 왜, 웨 등의 소리까지 섬세하게 구별해 적을 수 있는 데까지 나갈 수 있었다. 한글은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용도 이외에 앞으로도 활용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문자이다. 나는 한글이 매우 자랑스럽다. 그렇지만 우리말과 한글에 대한 이해도 없이 엉뚱한 자존심 타령에 동원되는 한글은 너무 안쓰럽다.

또 그리고 언어규범이나 문자규범은 언중들의 의사소통에 족쇄로 작용해서는 안 된다. 나는 ‘ㅋ ㅋ, ㅎ ㅎ, ㅠ ㅠ, 헐’ 등을 처음 마주했을 때, 한글과 우리말의 새로운 가능성에 대해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이렇게 짧고 간결하게도 자신의 상태나 생각을 전달할 수 있다니, 한글 그리고 우리말은 참 대단하다고 감탄했다. 보기에 불편하다고 자기들이 알아듣기 힘들다고, 인터넷과 스마트폰과 같은 새로운 문명의 바다에서 한글의 다양한 가능성을 창조적으로 실험하는 도도한 물결을 규범에 가두려는 발상이 참으로 가상하다.

나는 젊은 사람들이 더욱 발랄하게 재잘거리기를 바란다. 지금과는 다른 세상을 펼치고 살아가기를 바란다. 노래가사대로 ‘개웃기는’ 수작에 휘둘리지 마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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