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남시론]‘산상수훈’에 관한 오래된 오독 배호남 초당대 교수·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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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07월 03일(월) 17:36 |
그런데 필자에게는 교회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있다. 종파를 불문하고 ‘신도수가 1000명이 넘는 대형 교회들은 교회가 아니다’는 것이다. 그런 대형 교회들은 교회가 아니라 일종의 사교장이다. 교인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종교를 빌미 삼아 인맥을 넓히고 제 마음의 위안을 얻는 곳으로 변질되기 십상이다.
기독교의 창시자인 예수는 부자들을 싫어했다. 예수는 복음서 곳곳에서 대놓고 부자들을 비판한다.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기가 더 쉽다”는 마가복음 10장 25절 말씀(이후 성서 인용은 모두 <공동번역성서>의 1999년 개정판에서 가져온 것이다. <공동번역성서>는 천주교와 개신교가 함께 사용하기 위해 편찬한 성서이며, 일반 개신교 성경과는 다르게 ‘하나님’이 아니라 ‘하느님’이라 표기하고 있다)은 ‘부자가 천국에 가기 어렵다’는 말이 아니라 ‘부자는 천국에 가지 못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한국의 대형 교회들은 예수의 말을 교묘히 비틀어 부자들에게 면죄부를 준다. 바로 이어지는 26절에서 제자들이 “그러면 구원받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라고 묻자, 27절에서 예수는 “그것은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느님은 하실 수 있는 일이다. 하느님께서는 무슨 일이나 다 하실 수 있다”고 답한다. 대형 교회들은 하느님의 자리에 슬그머니 ‘교회’를 가져다 놓는다. 당신이 부자이지만 천국갈 수 있는 길이 있는데, 그건 교회에 나와서 하느님을 믿는 일이다. 교회에 헌금하면 천국의 곳간에 당신의 재물이 쌓인다. 사람은 못하지만 하느님만이 부자인 당신을 천국으로 보낼 수 있다. 그러니까 교회, 그 중에서도 부자들 많이 다니는 대형 교회 믿고 천국 가라.
예수의 부자 비판 중 가장 널리 오독돼 설파되어 온 것으로 ‘산상수훈(山上垂訓)’이 있다. 예수가 산 위에서 말한 가르침이라는 뜻인 ‘산상수훈’은 널리 알려진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로 시작한다. 산상수훈에는 8가지 복 받을 자가 나오는데, 이들을 ‘8복자(八福者)’라고 부른다. 마태복음 5장 3절에서 12절에 따르면 이 8복자는 ‘마음이 가난한 자’, ‘슬퍼하는 자’, ‘온유한 자’,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자’, ‘자비를 베푸는 자’, ‘심성이 깨끗한 자’,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자’,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자’이다.
그런데 이 ‘산상수훈’이 모든 복음서에 다 나오는 것은 아니다. 공관복음서(마태, 마가, 누가복음) 중 가장 먼저 쓰인 마가복음에는 이 내용이 없고, 마가 이후에 쓰인 마태와 누가복음은 그 내용이 많이 다르다. 공관복음서가 아닌 요한복음에는 산상수훈이 없다. 누가복음 6장 20절부터 26절까지의 산상수훈에는 4가지 복 받을 자와 4가지 불행한 자들이 등장한다. ‘가난한 자’, ‘지금 굶주린 자’, ‘지금 우는 자’, ‘사람의 아들(예수) 때문에 미움을 사고 욕을 먹는 자’는 복 받을 자들이다. 반면에 ‘지금 부요한 자’, ‘지금 배불리 먹고 지내는 자’, ‘지금 웃고 지내는 자’,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받는 자’는 앞으로 불행할 자들이다. 마태복음과 대비되는 누가복음 산상수훈의 가장 큰 차이점은 4가지 행복한 자들과 대비되는 4가지 불행한 자들에 대한 것이다. 이 불행한 자들의 면모는 ‘부요하고, 배불리 먹고, 지금 웃고 지내며, 칭찬을 받는’ 사람들, 즉 현재 부와 권세와 명예를 누리는 자들이다. 누가복음의 예수는 이 기득권자들에게 “하느님의 나라가 오면 너희는 불행할 것이며, 지금 누리고 있는 모든 부와 권세와 명예를 잃게 될 것이다”라고 명백히 말한다.
교회가 예수의 가르침을 의도적으로 오독하는 일은 기독교 역사의 처음 시작부터였다. 그 증거가 바로 ‘마음이 가난한 자’라는 마태복음의 구절이다. 대체 ‘마음이 가난한 자’는 누구인가? 누가복음 산상수훈의 첫 구절은 명백히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나니, 천국은 그들의 것이라”이다. 그리고 가난하지 않은 기득권 세력에게 “너희는 모두 불행할 것이다”고 말한다. 그런데 마태복음은 기득권 세력에 대한 저주는 쏙 빼고, 그나마 ‘가난한 자들이 행복하다’는 말에 ‘마음이 가난한 자’라고 슬그머니 한 글자 넣는다. 이 오독의 의도는 부자들의 마음의 짐을 덜어주려는 데 있다. 그러나 예수의 메시지는 명확하다. 지금 세상은 부자가 행복하고 가난한 자가 불행한 세상이지만, 하느님의 나라가 이 땅에 도래하면 가난한 자가 행복하고 부자는 불행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사도 바울 이후 기독교의 여러 사제들과 목회자들이 만들어낸 허상이고 변명이다.
예수는 2000년 동안 오해받아 온 고독한 갈릴리 청년이다. 그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고 따르기 위해, 우리는 기독교가 2000년 동안 만들어 온 모든 교리를 그 바닥부터 의심해보아야 한다. 그래야만 ‘마음이 가난한 자’와 ‘물리적으로 가난한 자’의 차이가 명확해지고, 예수를 믿는 사람이 누구를 사랑해야하는지 명확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