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조정태 "현장성에 기반…스토리 있는 작업 해보고 싶어"

[남도예술인]
작은아버지 조정일 시인과 함께 시화전 ‘콜라보’
줄곧 ‘민중화가의 길’ 걸어…사회적 본질에 주목
80년대 극단적 정치논리 아닌 현시대 화폭 투영

고선주 기자 rainidea@gwangnam.co.kr
2018년 06월 28일(목) 17:54
조정태 화가는 “현장성에 기반하고 있지만 이 기반을 유지하면 제 목소리를 내야 하니까 작업적인 측면에서 힘이 드는 게 사실”이라며 “소설을 그려볼 심산으로 스토리 있는 작업을 해보고 싶다”고 밝혔다.
남도는 예로부터 ‘예향’으로 불려왔다. 정작 중요한 것은 다른 지역에서 모두 가져가고, 호남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안겨준 닉네임이 예향이라는 소리도 있다. 어찌됐든 예향의 의미를 한번 빌려 쓰자면 이 지역에는 예술가족이 너무나 많다. 예술적 재능이 뛰어난 곳임은 분명하다. 시·서·화(詩書畵)가 꽃피웠던 전통만은 부인 못할 사실이다. 찾고자 하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는 것이 예술가족이다.

지난 6월8일에 만난 예술가족은 작은아버지와 함께 시화전(5월26∼6월11일 주안미술관)을 열었다. 바로 민중화가 조정태씨의 이야기다. 그의 작은아버지는 조정일 시인으로 시집 ‘몰래한 사랑’(서영 刊)을 펴냈다. 시화전 명칭으로도 쓰였고, 출판기념회도 전시 오픈식 때 성황리 열렸다. 조정태 화가로부터 시화전과 그간의 작품활동, 그리고 앞으로 계획 등에 대해 들어봤다.

먼저 시화전을 열게 된 계기부터 차근차근 들려줬다. 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작은아버지가 3년전 시집을 내겠다 말씀하면서다. 처음에는 시 넣고, 그림 넣고 했다. 다른 사람의 그림이었는데 시와 너무 맞지 않았다. 그래서 작은아버지와 함께 작업하기로 한 것. 처음에는 쉬울 줄 알았는데 시와 그림을 맞추는 일이 제일 힘들었다는 후문이다. 애초 시화전에 동참한 것은 전시를 같이 하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다. 시화를 유화로 시작해 50여점을 작업했지만 딱딱하게 그림이 나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야 했다. 시의 서정성을 유화로 뒷받침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판단을 했다.

빠르게 시화를 마무리하지 못한 채 2016년 광주시립미술관 북경창작센터 제8기 입주작가로 1년 동안 떠나 있는 동안에도 시화는 그의 숙제가 돼 있었다. 작은아버지께서 ‘어떻게 돼 가느냐’ 묻자 마음이 급해졌다. 그래서 수묵으로 바꿔서 작업을 했다. 드디어 시에 맞게 그림 75점이 잘 나왔다고 한다.

“제가 시의 3분의2는 소화했는데 3분의1은 너무 달달한 시였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작은 아버지가 집안의 중심 역할을 했습니다. 집안에서 모두 예술을 반대했는데 예술가 한명이라도 있어야지 하며 작은아버지만 예술을 지지해줬죠. 거기에 대한 감사함을 안고 살아왔기 때문에 시화도 자청해 맡게 된 거였어요.”

‘응시’
그는 사람들이 시화전을 보고 작은아버지의 꿈을 이뤄줬다는 말을 하지만 자신은 오히려 자기자신을 다시 발견하는 기회가 됐다는 설명이다. 이번 시화전이 문화예술계로부터 주목을 받은데는 기존 시화전이 굉장히 즉흥적이고 시의 내용을 살리지 못하는 그림이 많았는데 이번 시화전은 시의 내용과 그림이 일치한데다 시화가 일체형이 아니라 따로따로 설치돼 그림도 보고, 시도 볼 수 있다는 측면에서 좋은 반응을 이끌어냈다. 콜라보를 통해 더 나은 시너지를 낼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는 후문이다.

그는 원래 민중화가의 길을 줄곧 걸어왔다. 참여시 계열의 시풍이 아님에도 선뜻 시화를 맡은 것은 가족이라는 점 때문이다. 그는 민중화를 해오는 동안 사회구조와 인간의 관계를 조망하는 그림을 주로 작업해왔다. 어떠한 특정 사건 위주의 그림을 그리기보다는 그런 환경 속 자아의 위치를 그리는데 집중했다. 이를테면 촛불보다 그 안의 본질이나 사람들의 주요 관심사를 작업의 테마로 삼아왔다는 것이다.

“나이를 오십 넘기다보니 드라마를 보다가도 눈물을 떨어뜨릴 때가 생기더군요. 이런데도 서정이야말로 표현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걸 보면서 제가 여전히 조형요소가 부족하구나를 실감했죠. 조형어법이 훈련이 되지 않아 그런지 어려움을 느끼고 있는 거지요. 물론 제 나름대로 그리니까 제 나름의 서정이 있긴 하지만요.”

그는 시화의 생명으로 글쓴이의 머릿속에 들어가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의해 갈린다는 반응이다. 시를 쓴 의도를 제대로 알기 위해 작은아버지와 술을 마시며 시편마다 시를 쓴 사연이나 내용, 계기를 듣다보니 훨씬 이해가 빨리 돼 그동안 해왔던 작업을 폐기하고 다시 시화에 집중할 수 있었다. 시인이 표현하고 싶은 것을 그려야 한다는 것이다. 시화에서 그림은 철저하게 시를 위해 보조 역할을 하되, 두 장르는 동등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나중에는 제목만 보고도 그림 윤곽을 잡아갈 수 있다는 설명이다. 작은아버지와 자신의 어법이 비슷했다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에게 다소 의외의 자리일 수 있다. 그는 민중미술을 오랫동안 추구해 왔기 때문이어서다. 1986학번으로 1992년 광주전남미술인공동체(광미공)에 들어가 활동을 꾸준하게 전개해왔다. 그가 민중미술을 하게 된데는 사회적인 것들에 말하고 싶어서 였던 것으로 인식됐다.

‘붉은 의자’
“말하고 싶어 했던 게 있었던 것 같아요. 사회적인 것들을 말하고 싶었는데 그 창구가 민중미술이었던 것이죠. 저와 맞으니까 민중미술을 해온 것입니다.”

그는 오랜 기간 민중미술을 해오면서 그 구조 속의 문제에 대해 말했다. 모든 민중미술이 광주에서는 1980년대로 돌아가버린다는 점을 지적했다. 1980년대 미술이 상징성 혹은 스타성이 있었는지는 모르나 현재성으로 작업을 해도 결국 특정시기로 규정지어지는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1980년대로 맞춰놓고 박제화시킨다는 느낌 같은 것을 말한다.

“지금의 시각에 맞춰 해나가야 합니다. 환경이든, 남북관계든 모든 것이 다양화된 시대 아닌가요. 반대로 인간성 파괴까지 서슴없이 자행되고 있는 폐해도 비일비재해졌지요. 그렇더라도 80년대라고 하는 극단적 정치논리나 전투적 미술의 논리로 한계를 짓는 것은 문제죠. 각자 현장에서 지금의 시대를 화폭에 담아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그동안 시간이 흐르면서 많은 것이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한다. 이를테면 걸개가 없어졌는데 그것은 실사프린트가 되기 때문으로 걸개가 주가 되는 것이 이미 지났다는 반응이다. 더욱이 위 선배들과 달리 자신의 세대는 학습세대라는 것을 잊지 않고 밝힌다. 선배들을 하나의 틀을 만든 세대로 규정한다. 이 틀을 학습받았다는 것이다. 젊었을 때 이 틀이 체내화됐는데 운동으로서는 괜찮지만 작가로서는 관성이 돼 이를 탈피하는 데 오래 걸렸다고 토로한다. 자신을 계발하고 발전시키는 시기가 너무 적었다고도 한다. 20∼30대 현장에서 다 보내버리고 다시 작가로 돌아와 작업을 하려다보니 어려움을 겪었다는 전언이다.

“민중미술은 목적을 두고 그리니까 개성과 특질이 약화됐다고 봅니다. 개인이 모여 집단이 되는데 개인이 너무 약화 돼 버린 것이죠. 다시 개성이나 특질을 발현하는 일이 너무 힘들더군요.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아직도 현장성에 기반하고 있지만 이 기반을 유지하면 제 목소리를 내야 하니까 작업적인 측면에서는 힘이 드는 게 사실이죠.”

그는 이런 고민들이 상존해 있지만 앞으로 온전히 작업할 수 있는 시간이 10년 정도라고 말했다. 그렇다 보니 진일보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작업을 하고 싶은 꿈이 있다.

“작업실 없이 20년 동안 작업도 해봤구요. 그러면서 개인전을 일곱차례 열었으며 단체전은 수도 없이 참여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죠. 스토리 있는 작업을 해보고 싶어요. 그 작업은 시간이 아닌, 소설입니다. 소설을 그려볼 심산으로 작업에 임하겠습니다. 종국에는 광주에서 그림만 그리다가 갔다는 소리를 듣고 싶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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