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고지서를 받을 시간

정현아 경제부장

광남일보 @gwangnam.co.kr
2022년 02월 20일(일) 18:49
[데스크칼럼] 명품을 손에 쥐기 위해 매장 문이 열리자마자 달리는 ‘오픈런(open run)’이 종종 회자된다. 영하의 강추위도 아랑곳 하지 않고 밤샘 대기를 위해 교대로 줄을 서는 알바까지 등장했다고 한다. 코로나19가 낳은 풍경 중 하나다. 해외여행이 녹록지 않고 ‘오늘이 가장 싸다’는 유행어가 생길 정도로 명품 가격이 치솟고 있는 것과 맞물려 수요가 폭증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웃돈을 붙여 되파는 리셀(Resell) 열풍까지 가세했다니 일반적인 시장논리로는 이해가 안 될 도깨비놀음과 다를 바 없다.

명품소비는 이른바 ‘베블렌효과(Veblen effect: 가격이 오르는데도 일부 계층의 과시욕이나 허영심 등으로 인해 수요가 줄어들지 않는 현상.)’로 설명되지만 자영업자를 비롯한 대부분의 국민이 생사를 걸고 있는 코로나라는 특수 상황을 감안하면 설득력이 부족하다.

이보다는 억눌렸던 소비가 분출되는 ‘보복소비’ 현상이 잘 들어맞는다. 시중에 풀린 통화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면 이런 현상이 나타났을까? 최소한 필자가 기자생활을 한 30여년 동안 이렇게 많은 돈이 단기간에 풀린 경험은 없었다. 코로나 방역과 자영업자 손실보전금, 전 국민 재난안전지원금 등 다양한 명목으로 가히 천문학적인 돈이 시중에 공급됐다.

거리두기로 돈이 돌지 않아 생사의 기로에 선 자영업자를 비롯한 국민들에게 통화를 공급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우선 당장 내일을 보장 못하는데 미래의 부귀와 영화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돈을 움켜 쥔 중앙과 지방정부는 하릴없이 무너졌다. 광양시의 경우 지난해 3차례에 걸쳐 전 시민에게 재난지원금을 지급했다. 1인당 75만원으로 전남에서 가장 많은 액수다. 여수시는 최근 1인당 20만원씩을 지원했는데, 설 전 며칠 동안 무려 560억원이 넘는 돈이 풀려나갔다. 정부가 최근 마련한 2차 추가경정예산(추경) 14조원 가운데 11조 5000여억원이 코로나 방역과 소상공인 손실보상 명목으로 배정됐다. 지난 2년여 동안 풀려나간 나랏돈은 자본시장에 차고도 넘칠 정도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코로나로 막대한, 유사 이래 가장 많은 정부 예산을 쏟아부어 경기를 부양한 것이 비단 한국뿐만 아니라 전 지구적인 문제라는 점이다. 하지만 돈을 대가 없이 받아썼으니 ‘고지서’를 받아야 할 시간이다. 극강 자본주의 국가인 미국에선 이미 국민 개개인에게 고지서가 배달되기 시작했다. 먹고 사는 데 드는 모든 지출에 고지서가 첨부된다. 물가다. 음식료를 비롯한 모든 물가가 가파르게 오르기 시작했다. 시중에 풀린 돈의 절대 양이 많은 것도 물가인상으로 연결된다. 인플레이션이다. 1979년 중동사태로 인한 세계적인 인플레이션을 능가할 우려가 높다는 게 경제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인플레이션에는 반드시 통화 흡수정책이 뒤따른다. 금리 인상은 통화흡수의 대표적인 통화정책이다. 시중에 공급된 통화가 과도하다고 판단한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다음달 기준금리를 통상 한 차례 인상 폭의 2배인 0.5%p 인상하고, 올해 안에 많게는 5~7차례에 걸쳐 금리를 인상할 것이라는 예측이 나오고 있다.

우리 경제도 발등의 불이다. 미국시장의 정책 변동이 미칠 파급력은 불보듯 뻔하다. 지금은 불꽃 튀는 대선 정국에 갇혀 대부분 경제 이슈가 수면 아래 묻혀 있지만, 대선과 지방선거가 끝나기가 무섭게 가혹한 고지서가 국민들의 손에 날아들 것이다.

6.25 한국전쟁보다 더 험했다는 1997년 IMF 금융위기가 닥치기 전까지 정부기관이든 언론이든 그 누구도 나라 망한다는 경고를 하지 않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국고가 거덜났고, 국민은 빈털터리에 빚쟁이로 전락했다.

물론 이번에는 상황이 다르다. 시장에 통화공급이 과했다는 것도, 그에 따른 물가인상과 인플레의 위험에 대한 경고도 잇따르고 있다. 대처방법도 다양하고 구체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다행히 한국은행은 이미 지난해 8월부터 3차례에 걸쳐 기준금리를 선제적으로 인상하면서 인플레이션 위기를 방어하고 나섰다. 모두가 아는 위험은 위험이 아니라고 한다. 가계도 기업도 미리 대비해야겠지만 무엇보다 다가올 긴축의 시대를 헤쳐갈 단단한 리더십을 기다린다.
이 기사는 광남일보 홈페이지(www.gwangnam.co.kr)에서 프린트 되었습니다.

URL : http://www.www.gwangnam.co.kr/article.php?aid=1645350556409609043
프린트 시간 : 2025년 07월 04일 19:27: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