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수도’ 정신승리로 될 일인가?

백홍승 클래식음악 칼럼니스트

광남일보@gwangnam.co.kr
2024년 03월 14일(목) 18:33
백홍승 클래식음악 칼럼니스트
[문화산책] 요즘 많이 쓰는 ‘정신승리’라는 단어가 있다.

본인에게 불리하거나 좋지 않은 상황을 긍정적 상황으로 왜곡하여 정신적 자기 위안을 찾는 것으로 사실은 ‘자기기만’이며 망상 속에서 이기고 있는 상황을 의미한다. 젊은 아이들 사이에서 일종의 은어라고 봐야겠다.

소위 ‘국뽕’ 지식인들의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말은 이제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 어쩌면 당연한 현상이다. 한국적인 것은 그냥 한국적인 것이다. 그중에 세계에서 통하는 것이 있으면 또 세계적인 것이 되기도 하는 것이고.

아무튼 필자가 하고자 하는 말은 사실은 사실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거다. 개혁이네, 혁신이네 난리를 치지만 가장 기본은 자기 객관화와 자기 혁신이다.

우리 지역 공연물의 수준이 과연 대한민국 ‘문화수도’에 걸맞은 수준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가? 그런데 여기에는 지역 언론의 책임도 아예 없지는 않다고 본다. 듣기 좋은 말로 립 서비스 해주는 기사는 서로 ‘윈윈’하는 가장 무난한 방법일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공연 리뷰에 대해서만은 철저한 객관화와 전문성이 확보된 기사를 읽고 싶다. 물론 문화부 기자들에게 수많은 예술 장르에 관한 갑작스러운 전문성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그렇다면 해외 여러 문화도시 언론의 예처럼 화제가 될 만한 공연에는 전문가들의 공연 리뷰기사를 붙이는 것이 어떨지 싶다. 그것도 지역과는 특별한 연고가 없는 인물들로 눈치 보지 않고 쓰는 비평이라면 더욱 좋겠다. 언제까지 정신 승리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예전에 어느 해외 콩쿠르 우승을 계기로 갑자기 인기몰이를 하는 국내 협연자 연주회 때의 일이다. 솔리스트는 예상대로 뛰어난 기량과 풍부한 음악성으로 협연자로서의 역할을 다하는데 비해 오케스트라의 반주는 상당히 비대칭적이었다.(협연 곡은 너무나 유명한 곡이었다.) 공연 후 지역 음대에 재학 중인 한 학생의 오케스트라 때문에 몰입이 안 되더라는 푸념은 실망스러운 정도를 벗어나 거의 비난조였다. ‘벌거벗은 임금님’의 어린아이처럼 아직 지역사회 예술계 주류와 아무것도 엮인 게 없는 대학생은 거침없이 진실을 말했다. 이런 일은 지명도가 높은 소위 ‘거장’급들의 공연에서도 가끔 있다. 그러니까 만석을 이루었고 대성공이었다는 지역 문화면 기사에 대해 사실은 상당히 다른 의견도 있다는 말이다.

아쉬운 점은 또 있다. 해외에서 들어오는 공연물의 지역 소개도 여전히 지방(地方)티를 못 벗고 있다. 광주예술의전당 30년만의 리모델링 끝에 개최되는 재개관 공연에 대해 지역민들은 상당히 특별한 기대를 했었다. 공교롭게도 작년에는 세계 3대 오케스트라라고 하는 ‘빈 필하모닉’, ‘베를린 필하모닉’, ‘로열 콘세르트허바우’가 모두 들어와 내한 순회공연을 진행했었다. 결론을 이야기하면 30년만의 광주예술의전당 재개관 프로그램에서는 이런 공연들은 볼 수 없었다.

유럽과 미국의 세계적인 오케스트라, 발레단, 오페라단들이 아시아로 눈을 돌리기 시작한지는 이미 오래되었다. 현지에서의 장기화되는 불경기, 관객의 노령화로 인한 관객개발의 어려움 등으로 이들은 이제 거의 매년 투어 공연으로 수입을 올릴 수 있는 아시아 특히 일본, 중국, 한국으로 향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일본은 그러한 공연들의 중심지다. 2015년 조성진이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한 이후 가장 먼저 협연한 오케스트라는 NHK심포니였고 2018년 베를린 필의 예술감독 ‘사이몬 래틀’의 후임으로 ‘키릴 페트렌코’가 지명된 이후 베를린 필의 첫 아시아 투어도 일본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중국과 한국의 기획사들은 일본 공연 전후로 들렀다 가는 공연들을 잡기에 분주하다.

필자는 향후 전 세계 초일류 예술단체의 아시아 투어는 더욱 증가될 것이며 초청 조건에 대한 허들은 계속해서 낮아질 것으로 예상한다. 이제 시민들은 지역에서도 ‘베를린 필’, ‘로열콘세르트허바우’, ‘빈필’, 그리고 ‘파리오페라발레단’이나 ‘로열 발레단’의 공연들을 보고 싶어 한다.

얼마 전 광주시에서 오페라 전문 극장 건립을 추진한다는 언론 보도가 있은 후 찬반 여론으로 나뉘어 말들이 많은 것 같다. 오페라는 말 그대로 거대한 종합예술이다. 오케스트라와 합창단, 발레단, 음향, 조명, 무대미술, 의상, 분장, 콘텐츠기획팀 등 수많은 장르를 포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상당한 재정적 지원을 필요로 한다. 반대하는 쪽 사람들의 말처럼 수천억을 들여 극장을 지어놓고 콘텐츠가 없어서 대관이 주(主)업무가 되어 버린다면 그것도 기가 막힐 일이긴 하다. 그런 이유에서 당연히 전문 인력 확보를 통한 운영, 제작 시스템 마련과 건립 후 소요되는 막대한 재원 조달의 구체적 계획 수립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본다.

국내에서는 오페라전문극장으로 2003년 개관한 1490석의 대구 오페라하우스가 ‘오페라 도시 대구’를 지향점으로 하여 약진하면서 꽤 성공적인 모델이 되고 있다. 올해부터는 이탈리아 등 매년 유럽 주요 도시 투어 공연을 기획중이라니 국내 지방의 오페라하우스가 오페라의 발상지에서 공연을 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획기적이고 대단한 일이다.

우리 지역이 20년째 ‘오페라 도시’를 표방하며 엄청난 투자를 해온 대구나 정명훈을 총감독으로 영입하고 오케스트라, 연출, 가수 등을 세계적 수준의 출연진으로 구성해 승부를 보겠다는 부산과 예산의 규모로서는 겨뤄볼 수 있는 여건이 전혀 못 된다.

그러나 광주예술의전당에는 오페라하우스 운영에 필수적 예술단체인 ‘시립발레단’, ‘시립오케스트라’, ‘시립합창단’, ‘시립오페라단’이 상주 단체로 있는 특별한 이점을 갖추고 있어 예술단체의 조직 구성만으로는 이미 미주, 유럽의 일류 오페라 극장의 기본 구성 요소와 비슷하다. 따라서 오페라 극장 운영진의 운영 능력에 따라서는 국내를 대표하는 오페라단으로 급성장 할 수 있는 최소한의 필요충분조건 자체는 갖추어져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정말로 성공적인 운영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과 의지와 비전이 확실히 담보 될 수만 있다면 나는 개인적으로 지역 오페라 극장 건립계획에 적극 찬성한다.

그리고 이번 기회에 자칭 ‘문화수도’라는 정신승리에서 한번 벗어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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