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성과 소멸 관계 탐색…다층적 삶의 양태

김병호 시인 네번째 시집 ‘슈게이징’ 펴내
기억 안팎 조망…시적 수준 견고하게 구축

고선주 기자 rainidea@gwangnam.co.kr
2024년 12월 10일(화) 18:14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발끝만 바라보고 서 있었다. 하루만 남은 마음으로 하루만 살았다. 괜찮지 않았다’.

이는 광주출생 김병호 시인(협성대 문예창작과 교수)이 네번째 시집 ‘슈게이징’(시인의일요일 刊)을 최근 펴내면서 작가의 말에 밝힌 내용이다. 하루만 남은 마음은 온전히 하루를 다 불태워버렸기 때문에 업데이트라는 측면에서는 부합될 수 있으나 삶의 에너지 자체를 모두 방전했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삶은 늘 비상을 대비해야 한다. 완전 방전되지 않고 미미한 배터리를 남겨두면 결정적 순간 생존의 신호로 쓰일 수 있다.

시인에게 시적 감정 역시 마찬가지일 터다. 모두 소진하면 다시 충전하면 될 일. 하지만 자주 반복하면 다음 단계 배터리는 견고한 구조가 흐트러져 방전이 빨리 이뤄지는 것은 불보듯 뻔하다. 제목인 ‘슈게이징’은 1990년대 초반 영국에서 유래된 얼터너티브 록의 하위 장르다. 나른한 보컬 멜로디와 기타 이펙터의 노이즈를 사용한 사운드가 특징이다. 음악의 특성은 관객을 안중에 뒀다기보다 자기 자신만의 음악적 치열성만 선보이는 구조다.

‘슈게이징-여름 감기’에서 ‘마음만 닿아도 얼룩이 지고 멍이 드는 마음’의 상태가 아닐까 싶다. 시인은 시편들을 통해 생성과 소멸의 관계를 탐색하려 한 듯하다. 생성과 소멸 역시 인류가 무수히 반복해오면서 끝내는 자신의 존재를 지워내는 이치와 같은 맥락에서 슈게이징한 세상에의 기억을 해부한다. 슈게이징이라는 단어를 제목으로 차용한 15편의 시들은 모두 이런 문맥 속에서 시적 울타리를 견고하게 굳힌다.

김병호 시인(협성대 문창과 교수)
‘슈게이징-어제의 정성’ 역시 마찬가지다. 시인은 ‘당신이 그랬듯이 꽃이 다 지고서야 봄을 알았지/ 싸리비로 꽃잎을 쓸면 겨우 지운 이름에 다시 얼룩이 돋고/누가 오는지도 모른 채 하루 내 기다리는 사람처럼/무릎을 안고 가만가만, 눈썹을 뜯어 하늘에 붙이지’라고 노래한다. 생성을 하고 있어도 필연적으로 얼룩이 질 수밖에 없는 우리네 삶의 안팎에 놓인 시간들만 째깍째깍 흘러갈 뿐 존재하는 것들은 생성했다가 소진을 반복해 간다.

시인은 여전히 복잡다단한 일상과 신자본주의에 포위된 삶들이 각자의 영역에서 자신을 불태우며 소멸로 한발 한발 다가간다는 것을 인지한다. 이처럼 시인에게 슈게이징은 처음과 끝, 그 사이에 끼워진 가운데 혹은 틈 또는 경계가 놓여 있다. 그가 말하는 슈게이징은 철저하게 이타적이지 않고 개별로 흩어져 있다.

이를테면 시 ‘당신만 모르는 안부’에는 막다른 골목, 뒷걸음질, 어둠 속, 도망, 담장, 고요, 덜컹, 겨울 밤, 아프다, 부러지다, 슬프다 같은 부정의 시어들이 넘쳐난다. 시인에게 안부를 묻는 주체는 근심 그 자체로 얼룩진다. 시인은 ‘마지막에 연고가 없어/이제 저는 웬만’하다고 밝힌다. 정주가 아닌 이주, 친목이 아닌 해체, 채움이 아닌 비움의 상태, 그리고 고독과 외로움에 오랫동안 노출된 자로서의 파편화된 삶의 양태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듯싶다.

이번 시집은 ‘사랑을 용서해야 하는 마음을 아직 모릅니다’, ‘꽃이 지면 자꾸 신발이 닳는 것처럼’, ‘거기, 누구 없어요?’ 등 3부로 구성, 분주한 가운데 틈틈이 창작한 50편의 작품이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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