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호남의 자정순국(自靖殉國) 지사들 김석기 광주지방보훈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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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09월 09일(화) 17: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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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기 광주지방보훈청장 |
황희 정승과 의병의 후손으로 자부심을 갖고 자란 매천은 이건창·김택영과 더불어 한말삼재(韓末三才)로 불렸던 인물이며, 시(詩)·서(書)·화(畵)·문(文)·사(史)에 능해 오절(五絶)이라고도 불렸다.
그런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유는 1910년 8월 29일 강제 한일합방, 즉 경술국치(庚戌國恥)로 나라를 잃은 울분 때문이었다. 그는 “나라가 오백년 간 사대부를 길렀으니, 이제 망국의 날을 맞아 죽는 선비 한 명이 없다면 그 또한 애통한 노릇 아니겠는가?(하략)”로 시작하는 유서를 남겼다. 이를 자정순국(自靖殉國)이라고 한다.
자정순국 투쟁은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된 데 분노해 민영환·이한응·조병세·홍만·송병선 등 10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시작되어 경술국치의 해인 1910년에는 35명에 이르렀다. 이 중 호남인이 14명으로 무려 40%를 차지했다.
황현(영광)을 비롯해 송주면·송완명(화순), 정두흠(장흥), 정재건(곡성), 공치봉(순창), 정동식(전주), 김근배·김영세(익산), 김천술·김영상(정읍), 박병하·백인수(고창), 장태수(김제) 등이다.
조선 말기의 문신·학자였던 장흥의 정두흠 지사는 강제 한일합방 소식을 듣고 “내가 무슨 면목으로 저 하늘의 해와 달을 대할 것인가. 살아서 설 곳이 없으니 죽어서야 돌아갈 땅이 있겠구나”라는 유언을 남기고 자결했다.
사헌부 지평을 지내고 을미사변 이후 호남 동북지방에서 의병궐기를 주도했던 곡성의 정재건 지사도 부인과 세 아들에게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승문원 부정자 등 여러 관직을 지내다 고향에 돌아와 신명학교를 창설하고 배일사상을 고취 시켰던 김제의 장태수 지사 역시 일제가 은사금으로 회유하려고 하자 식음을 전폐하고 ‘고대한동포문’이라는 유서를 남기고 순국했다.
이분들을 호남지역 3대 순절자라고 부른다.
그 뿐인가. 우물에 투신해 순국한 성균관 박사 출신 김근배 지사는 순절한 뒤 항일의 의기가 퍼질까 봐 두려워한 일제의 간섭으로 빈소조차 차리지 못했다.
사헌부 지평을 지낸 정동식 지사도 “나라가 망하고 없으니 어디로 돌아갈 것인가. 구차히 목숨을 보전하니 또한 비루하지 않은가”라며 목을 메었다.
강물에 투신했다가 일본 헌병에게 구조되자 옥중 단식으로 삶을 마친 김영상 지사도 “원수랑 함께할 수 없다”는 절명시를 남겼다.
이렇게 자정순국한 호남인은 대부분 유학을 공부한 학자이거나 퇴임한 전직 관료들로 선비들이었다.
단식으로 곡기를 끊어 순국한 분이 5인으로 가장 많았고. 그 다음으로 우물 투신과 음독이 각 2인, 목을 찌르거나 멘 분 그리고 강물 투신이 각각 한 명씩이었다.
경술국치에 항거한 자정순국 투쟁은 호남지역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한말 의병전쟁도 1907년 기준으로 전국의 60% 이상을 차지하리만큼 호남에서 가장 치열하게 전개됐음을 고려할 때 호남인의 자결순국 투쟁은 그 연장선상에서 바라봐야 할 것이다. 제국주의의 침략에 맞서는 투쟁의 한 방편인 것이다.
자정순국은 살기 싫어 세상을 버린 것이 아니다. 일제의 무도한 침략과 병합이 무효이며, 정당성이 없다는 신념과 주장이 그 안에 담겨 있다. 때문에 그들의 선택은 민족적 자존심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의 죽음은 일제의 식민통치 기반을 흔들고, 겨레의 항일독립 의지를 일깨워 거족적 항일투쟁을 이어가게 하는 단초가 됐음을 부인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