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실용주의 정치 - 추상인가, 구상인가

노희용 광주문화재단 대표이사

광남일보@gwangnam.co.kr
2025년 09월 16일(화) 10:01
노희용 광주문화재단 대표이사
며칠전 전시회에 들렀다. 한 폭의 그림에 눈이 갔다. 멀리서 보니 흐릿한 얼룩처럼 보였는데, 가까이 다가가니 선과 점, 색의 결이 촘촘히 박혀 있었다. “이게 무엇을 말하고 있나?” “왜 이토록 낯설게 표현했을까?” 작품은 말이 없었다. 설명하지 않고 그냥 보여줄 뿐이었다. 관객이 이해하길 기다리고, 오해하면 그대로 수용한다. 정치도 이와 같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현실 정치는 너무 많은 말, 촘촘한 계산, 빠른 해명 속에서 본래의 모습은 퇴색되고 만다. 정치가 예술이라면, 우리는 지금 어떤 스타일의 그림 속에 살고 있는가? 사실을 재현하는 구상미술일까? 아니면 감정과 관념을 해체하는 추상미술일까? 구상미술의 사물 윤곽은 명확하고, 배경과 인물은 눈에 익다. “이건 나도 알겠다”, “이건 내가 사는 동네 같다”고 말할 정도로 친숙하다. 그러나 내면의 동요나 불안, 시대적 기운과 흐름은 추상이 아니고서는 표현할 수가 없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있는 그대로’를 말하는 정치는 기술자의 언어에 불과하다. 숫자와 절차, 계획과 실행의 언어로 도배된다. 그러나 시민이 바라는 것은 종종 그 너머에 있다. ‘왜 그 일이 중요한가’,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가치에 답해주길 원한다. 즉, 정치에는 구상과 추상이 모두 필요하다. 사실과 가치가 균형을 이루도록 하는 것이 바로 정치의 예술성이다. 이 시대의 시민은 단순한 관객이 아니다. 지금 시민들은 참여를 원한다. 지도자가 “왜 그것이 필요한지”를 설명하면, 시민은 되묻는다. “그것이 나의 삶과 무슨 상관인가?”

이재명 대통령이 말하는 실용주의는, 이 두 질문 사이에 다리를 놓으려는 시도처럼 보인다. 정의와 공정이라는 추상적 가치를 공공정책이라는 구상적 언어로 변환하려 한다. 그림자를 형상으로 고정시키는 과정이다. 그래서 실용주의는 단지 ‘유용함’에 그치지 않고, ‘가치를 구현해내는 기법’이다. 이러한 실용주의의 철학을 지방은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우리의 행정은 무엇을 그리고 있는가? 완성되지 않은 밑그림일까? 계속해서 덧칠만 하는 것은 아닐까? 이런 정치의 변화는 중앙만의 일이 아니다. 지방도, 그 흐름을 정확히 읽어내야 한다.

행정은 새로워져야 한다. 눈앞의 숫자보다는 시민이 무얼 느끼고 있는가,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가, 다수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무엇에 분노하고 있는가를 정확하게 읽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거대한 행정조직이 있고 그 조직에는 수많은 사안에 대한 결정권이 주어져 있다. 결정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고 일의 경중이 다르기에 그 권한이 조직의 계층에 적절하게 분산돼있다. 그 시스템이 잘 유지되어 제대로 작동하면 조직 내부의 의사결정과정이 능률적으로 이루어지고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다. 그리고 그 이익은 온전하게 시민의 품에 안긴다.

시민의 태도 또한 달라져야 한다. 시민은 이제 소비자가 아니라 공동 창작자가 되어야 한다. 민주주의는 정교한 예술이다. 참여가 없이는 완성되지 않으며, 피드백이 없이는 성장하지 않는다. 따라서 좋은 정치란 단지 좋은 지도자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좋은 시민이 함께 만들어 나가는 합작품이다. 지도자와 시민은 ‘소통’이라는 수단으로 결합된다. 그래서 언론이 중요하다. 언론과 잘 지내는 것은 개인의 영달을 위해서가 아니라 시민들의 여망이 무엇인지 잘 듣기 위함이고, 지도자가 한 일을 시민에게 잘 알리기 위해서이다.

정치는 본래 실험이다. 한 번의 붓질로 완성되는 그림이 아니듯, 한 번의 정책으로 도시가 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의지가 있다면, 가능성은 늘 열려 있다. 경제는 단지 돈의 흐름이 아니라, 사람의 의지를 담는 그릇이다. 지역 경제를 일으킨다는 것은, 결국 시민이 자신을 믿고 미래를 상상할 수 있도록 만드는 일이다. 방향 제시는 정치가 할지 모르겠지만 실제로 움직이는 것은 경제다. 그래서 경제는 정치와 분리된 기술이 아니라, 실용적 이상을 실현하는 통로이기도 하다.

예술사에는 한 시대를 바꾼 사조들이 있다. 사실주의가 귀족적 형식을 부수고 민중을 화폭의 주인공으로 삼았다. 인상주의는 빛과 순간의 감각을 포착하며 새로운 시선을 열었다. 이처럼, 새로운 사조는 세계를 바꾸면서 등장한다. 지금 우리 정치에도 새로운 사조가 등장했다. ‘빠르게, 구체적으로, 현실에서 작동하는 정책’이라는 실용주의는, 그것은 단지 정책의 기술이 아니라, 새로운 정치 문법이다. 우리는 이제 실용주의 캔버스 앞에 서 있다. 아직 모든 선은 그어지지 않았고, 모든 색은 채워지지 않았다. 이제 시작이다. 우리는 그 위에 함께 그림을 그려야 한다. 그것이 정치를 예술처럼, 예술을 정치처럼 만드는 유일한 길이며, 그 길 끝에는 지금보다 훨씬 더 따뜻한 시민의 삶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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