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10주년…민주화 헌신 ‘삶과 시정신’ 기린다

민중운동 앞장 문병란 시인 10주기
추모시선집 ‘직녀에게’ 작가서 펴내
교수·시인 추천 4부 구성 60편 수록
추모식 21일 국립5·18묘지서 첫 선

고선주 기자 rainidea@gwangnam.co.kr
2025년 09월 18일(목) 15:44
이별이 너무 길다
슬픔이 너무 길다
선 채로 기다리기엔 은하수가 너무 길다.
단 하나 오작교마저 끊어져 버린
지금은 가슴과 가슴으로 노돗돌을 놓아
면도날 위라도 딛고 건너가 만나야 할 우리,
선 채로 기다리기엔 세월이 너무 길다.
그대 몇 번이고 감고 푼 실을
밤마다 그리움 수놓아 짠 베 다시 풀어야 했는가.
내가 먹인 암소는 몇 번이고 새끼를 쳤는데,
그대 짠 베는 몇 필이나 쌓였는가?
이별이 너무 길다
슬픔이 너무 길다
사방이 막혀 버린 죽음의 땅에 서서
그대 손짓하는 연인아
유방도 빼앗기고 처녀막도 빼앗기고
마지막 머리털까지 빼앗길지라도
우리는 다시 만나야 한다
우리들은 은하수를 건너야 한다.
오작교가 없어도 노돗돌이 없어도
--시 ‘직녀에게’ 전문

위 시는 시인의 대표작이다. 가수 김원중이 노래로 부르면서 유명해졌고, 민중가요로도 대중들에 회자됐다. 노래로만 아는 사람들은 그저 유명한 노래로 기억하는데 그치겠지만 사실은 1970년대와 1980년대 이땅의 민주화를 위해 가열차게 투쟁에 나섰던 한 시인의 시대에의 폐부를 깊이 찌르던 고뇌에 찬 시였다. 원로 문학평론가 임헌영 선생은 “아마 분단시대의 절절한 민족적인 소망을 담아낸 절창”으로 평가했다.

광주전남을 넘어 그의 이름은 민중들에게 투사의 시인이자 민중의 시인, 농민의 시인, 노동의 시인, 거리의 시인으로 불리웠다. 시위현장에 가면 당연히 그를 만날 수 있었다. 부조리한 시대, 기꺼이 거리에서 투쟁을 멈추지 않았던 전남 화순 출생 민중시인 문병란(전 조선대 교수·1935∼2015)이 그다. 벌써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0주기를 맞았다. 25일이 그의 기일이다.

그의 10주기를 앞두고 삶과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한 추모 시선집이 나왔다. 문병란시인기념사업회(회장 이명한 원로소설가) 기획으로 도서출판 작가에서 시인선 24번째 권으로 나온 ‘직녀에게’가 그것이다. 시인선이 나오기까지 광주전남작가회의 소속 회원 중 문병란 시인을 어느 누구보다 잘 알거나 그로부터 배웠던 제자, 그의 시세계를 조명한 학계 인사 등이 시 작품에 대해 엄선, 추천한 작품들로 엮어졌다. 김동근(전남대 명예교수) 허형만(전 목포대 교수) 나종영(전 광주전남작가회의 회장) 백수인(전 조선대 교수), 박노해 시인 등이 시편을 추천했다. 이들은 시집과 시선집, 육필시집 등 그가 생전 남긴 26권의 시집들에서 중복되지 않은 시편들을 엄선했다.

소설가 요산 김정한(1908∼1996) 선생의 흉상 옆에 선 생전의 문병란 시인.
문병란 시인.
그리고 출향 시인으로 시집 내용을 들여다보면 감수를 아끼지 않은, 서울에서 활동을 펼쳐온 이승철 시인과 출판 방향을 잡아준 작가 출판 손정순 대표, 문병란 김준태 시인 등 광주전남 저항문학을 일본문단에 꾸준하게 소개해온 김정훈 교수(전남과학대 교수), 시인의 제자인 백명수 전 일월서각 대표 등이 이 시선집 출간에 큰 도움을 줬다.

문학평론가 백낙청 명예교수(서울대)와 한국문단의 원로비평가 및 재야 원로인 임헌영 선생 등도 추모 시선집 출간에 공감했다.

백낙청 명예교수는 “고 문병란 시인의 10주기를 맞아 문단과 지역의 후학들이 시선집 출간을 추진한다고 들었다. 반갑고 감사한 일이다. 문 시인이 한국의 민주화와 이땅의 문학에 끼친 공로를 우리 후진들이 잊어서는 안될 것”이라고 언급했다.

또 임헌영 선생은 문병란 시인에 대해 타고난 민중성으로 민주화와 통일운동에 헌신한 낙천적인 활동가로 기억했다.

그는 “‘화염병 대신 시를 던진 한국의 저항시인’으로 널리 소개된 선생의 활동 영역은 그 다재다능한 투지의 열정으로 1980년대 광주 민주항쟁 정신을 발양시키기 위해 전국의 모든 집회와 강연장은 물론이고 세계 각처를 누볐다. 그의 시는 민중적인 호소력이 있는 데다 낭독의 기교까지 탁월해 대중집회에서 대인기였고, 그의 재기발랄한 군중 집회에서의 강연 또한 대인기였다”고 말했다.

이번 시선집은 전반기, 중반기, 후반기에서 엄선한 시편들을 유형별로 엄선해 제4부로 구성했으며, 앞서 언급한 ‘직녀에게’를 비롯해 등단작의 한 편인 ‘가로수’, ‘정당성’(1·2), ‘식민지의 국어시간’, ‘죽순밭에서’, ‘불면의 연대’, ‘땅의 연가’, ‘무등산에 올라 부르는 백두산 노래’, ‘아직은 슬퍼할 때가 아니다’ 등 그를 대표할만한 시 60편이 실렸다.

서재에서의 문병란 시인
김준태 시인은 회고의 글을 통해 “필자의 경우 문병란 선생님과 문학적으로 혹은 오랜 삶과 역사 속에서 함께한 세월이 60여 년을 넘어섰던 것 같다”며 “척박한 분단 한반도에서 살아서는 민족시인, 하늘에 가서는 ‘통일시인’으로 넉넉하게 빛나면서 남북삼천리 언제나 그리운 이 땅의 하늘과 땅에서 당신의 노래와 함께 영원하시리라 믿는다. 선생님을 기리는 시선집을 펴내며 통일의 그날을 둥글게 그려본다”고 밝혔다.

한편 문병란 시인 10주기 추모식은 오는 21일 오전 11시 국립5·18민주묘지 역사의문에서 광주전남추모연대와 이철규열사추모사업회 주관으로 거행된다. 이 추모식 자리에서 배포될 예정이다.

추모시선집 ‘직녀에게’에 앞서 광주 동구 지원 아래 타계 10주기를 맞아 광주 시민이 애송하는 100편의 시를 담아 묶은 ‘광주, 너는 오월의 휘앙세’가 박노식 시인 총괄기획으로 심미안에서 출간돼 10주기를 기리는 분위기가 점차 고조되고 있다.
고선주 기자 rainidea@gwangnam.co.kr        고선주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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