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여수·순천 10·19사건 77주년에 바란다 명창환 전남도 행정부지사
광남일보@gwangnam.co.kr |
2025년 10월 15일(수) 19: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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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창환 전남도 행정부지사 |
조영두씨는 손이 귀한 집 아들이었다. 좌익단체 가입을 권했지만 가장으로서 책임감에 거절했다. 그는 여수·순천 10·19사건(이하 여순사건)이 발발하고 저 한마디만 남긴 채 그렇게 끌려가 돌아오지 못했다. 결혼한 지 2년, 유족 조선자씨가 어머니의 뱃속에 있을 때 일어난 일이었다.
여수와 순천, 전남 동부권 일대에 아프지 않은 사연이 하나도 없다. 4월 제주, 유채꽃의 제주가 피바다가 됐 듯, 10월 여순, 동백의 여순도 피로 물들었다. 가족을 잃은 사람은 ‘반란군 가족’이라고 누명을 썼고, ‘빨갱이 가족’이라고 손가락질 받았다. 평생 이름 없이 살았고, 고향은 돌아갈 수 없는 땅이 됐다.
여순사건은 6·25전쟁, 제주 4·3사건과 더불어 한민족 최대 비극 중 하나로 꼽힌다. 1948년 10월 19일 여수에 주둔한 국군 제14연대 병사들은 제주 4·3사건 진압명령을 “동포를 학살할 순 없다”며 거부했다. 이어 단독정부 수립 반대, 미군 철수 등을 외치며 여수와 순천 등 전남 동부 일대를 점령했다. 이승만 정부의 진압(토벌) 과정에서 많은 민간인 희생을 낳았다. 전남도 조사 결과만해도 1만1000여명에 이른다. 더 많을지 모른다. 이름없는 무고한 주민까지 스러져갔다.
여순사건은 오랫동안 금기시됐다. 지역 전체가 ‘빨갱이의 땅’으로 낙인찍혔다. 피해자는 입을 열 수 없었고, 유가족은 신분상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다. 오랜 침묵과 무관심을 거쳐 1998년 시민사회 중심으로 ‘여순사건 진상규명 추진위원회’가 꾸려졌다. 이후 정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진상규명과 실태조사에 나섰다. 하지만 부족했다.
더 늦어선 안된다는 생각에 전남도가 발 벗고 나섰다. 2018년 여순사건 70주년을 맞아 기념사업을 추진하고 합동 추념식을 가졌다. 도지사가 직접 참석해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을 사죄하고 희생자께 사과했다. 그래도 부족했다. 정부 차원의 사과와 배상, 명예회복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기회마다 문을 두드리고 또 두드렸다.
끈질긴 건의 끝에 2021년 7월 ‘여순사건 특별법’이 제정됐다. 쌍둥이 사건인 제주 4·3보다 20년이나 늦었지만 73년 만에 첫발을 내디뎠다. 역사적 전환이 시작됐다. 이후 진상규명위원회가 출범하고 이를 위해 희생자와 유족 신고를 받기 시작했다. 올바른 진상조사 보고서로 역사를 바로잡고 기록할 기획단도 꾸려졌다. 명예회복의 길이 열린 것이다.
2021년 8월 당시 이재명 대선 예비후보는 여수 이순신공원을 찾아 “여순사건은 근대사의 가장 아픈 상처다”며 “법의 취지에 따라 철저한 진상조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2021년 추념식에는 국무총리가 찾았다. 2022년 10월 74년 만에 전국 최초로 정부 합동 추념식이 광양에서 열렸다.
이후 전남도는 여순사건 유족께 생활보조비를 드리는 지원 조례를 만들고 유가족을 돕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여순사건을 기리는 평화문학상 운영 조례를 제정하고, 여순사건 다크투어를 전국화하는 등 위령사업 추진에 나섰다. 여순사건 홍보관을 짓고 올바른 사실을 알리는 등 인식 개선에도 힘썼다. 유해를 찾아 유족께 돌려드리고도 있다. 많은 희생자가 재심으로 무죄판결을 받고 있다. 지역 차원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제주 4·3사건은 특별법 제정,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를 시작으로 대통령의 추념식 참석, 공식 사과, 국립 4·3평화공원과 트라우마센터 건립, 희생자 무죄판결로 이어졌다. 이 동안 사건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고, 현기영의 ‘순이삼촌’, 이산하의 ‘한라산’, 강요배 화백의 그림 등 제주 4·3의 이야기가 전 세계에 울려 펴졌다. 이 시작에는 2003년 55년 만에 이뤄진 노무현 대통령의 공식 사과가 있었다.
쌍둥이 사건인 여순사건도 이제 시작해야 한다. 책임있는 정부 인사가 나서 대한민국 정부 차원에서 사과해야 한다. 희생자의 넋을 달랠 위령공원을 짓고, 유족의 설움을 달래줄 평화재단과 트라우마치유센터를 세워야 한다. 국가가 먼저 사죄하고 손을 내밀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 사회가 ‘이념’의 굴레를 벗어 던지고 용서와 통합의 사회로 거듭날 수 있다.
여순사건 추념식이 사흘 남았다. 77년 전인 1948년 10월 대한민국 최초의 계엄으로 무고한 민간인 1만여명이 동백꽃처럼 스러졌다. 2025년 6월 국민과 함께 대한민국의 마지막 계엄을 저지한 새 정부가 출범했다. 마지막 계엄을 저지한 정부가 이제는 최초의 계엄 희생자를 어루만져 주길 간곡히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