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동원’ 정신영 할머니, 80년 만에 일본 간다

미쓰비시 공장서 노동…1심 승소·항소심 진행중
근로정신대 돕는 ‘소송지원회’ 회원들 만남 예정

임영진 기자 looks@gwangnam.co.kr 윤용성 기자 yo1404@gwangnam.co.kr
2025년 12월 04일(목) 19:02
1944년 5월말 나주대정국민학교(현 나주초등학교) 6학년 재학생과 졸업생 등 24명이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 항공기 제작소에 동원됐다. 1944년 6월경 일본에 도착해 본격적인 노동에 투입되기 전 나고야성 앞에서 쵤영한 기념사진.
정신영 할머니


일제강점기 미쓰비시중공업 일본 나고야항공기제작소에 강제 동원돼 모진 고역을 치른 정신영 할머니(95·나주)가 광복 80년 만에 강제 징용 현장을 다시 찾는다.

4일 (사)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에 따르면 정 할머니는 오는 6~8일 시민모임 회원들과 함께 일본 나고야를 방문한다. 1945년 10월께 구사일생으로 고향 나주에 돌아온 이후 강제 징용 현장을 다시 밟는 것은 꼭 80년 만이다.

정 할머니가 일제의 강압과 회유에 못 이겨 일본으로 끌려간 것은 14세의 어린 나이였던 1944년 5월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주초등학교 졸업 후 가사일을 돕던 중 마을 구장(區長·말단 행정관리)과 담임선생님의 ‘일본에 가면 돈도 벌고 상급학교에도 진학할 수 있다’는 강요에 못이겨 일본으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실었다.

일본에서 배를 곯아가며 죽도록 일했지만, 월급 한 푼 손에 쥐어 보지 못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44년 12월7일 발생한 도난카이(東南海) 대지진으로 또래 친구 김향남·최정례(나주), 이정숙(영암 금정), 서복영(해남 산이면), 김순례(광주), 오길애(목포) 등 6명은 무너진 공장 건물더미에 갇혀 짧디짧은 생을 마치고 말았다.

구사일생으로 고향에 돌아왔지만, 일본에 다녀왔다는 이력은 평생을 따라다니는 ‘멍에’가 됐다. 정 할머니는 “일본 갔다 왔다고 하면 시집을 가니 못 가니 하는 분위기 때문에, 그나마 간직하고 있던 사진도 일부러 찢어버렸다”고 한탄했다.

양금덕 할머니가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소송에 나섰다는 소식을 뒤늦게 알게된 정 할머니는 2017년 딸의 손을 잡고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의 문을 두드렸다.

결국 지난 2020년 1월께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광주전남지부의 도움을 받아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광주지방법원에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지만 정 할머니는 2022년 8월 또 한 차례 일본 정부로부터 모욕을 겪어야 했다.

피해 사실을 증빙하기 위해 일본 시민단체 ‘나고야 미쓰비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송을 지원하는 모임’을 통해 후생연금 가입 사실을 조회했지만 후생노동성 산하 ‘일본연금기구’는 기록이 없다며 발뺌했다. 일본 국회의원까지 나서자 일본연금기구는 뒤늦게 가입 사실을 인정했으나 탈퇴수당 명목으로 보낸 금액은 고작 한화 ‘931원’이었다.

정 할머니 사건은 2024년 1월 1심에서 승소한 뒤 미쓰비시중공업의 항소로 현재 광주고등법원에 계류 중이다.

정 할머니는 근로정신대 소송을 돕고 있는 ‘나고야소송지원회’ 회원들과 투병 중인 다카하시 마코토 대표를 만나는 한편, 7일 오후 1시 나고야에서 개최하는 ‘도난카이(東南海) 지진 81주년 희생자 추도식’에 참석할 예정이다.

정 할머니는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지진 당시의 공포와 폭격기 굉음 소리는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는다”며 “이제는 지팡이를 짚어야 움직일 수 있지만, 죽기 전에 그때 억울하게 죽어간 친구들 흔적이라도 찾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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