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곡선

강혜경 문학박사·문화기획자

광남일보@gwangnam.co.kr
2025년 12월 11일(목) 17:30
강혜경 문학박사·문화기획자
[문화산책] 사람의 기억은 완벽하지 않다.
선명했던 기억의 순간도 시간이 흐르면 조금씩 흐려지고, 어렵게 간직한 감정과 경험의 흔적 역시 서서히 빛을 잃기도 한다. 그러나 때때로 어떤 장면은 이상하리만큼 또렷하게 남아 오랜 시간이 지나도 흔들리지 않는다. 우리는 많은 것을 기억한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이러한 선명함과 흐려짐이 뒤섞인 기억의 오류와 불완전함 속에서 살아간다.

이는 인간의 기억이 ‘무한 저장’이 아니라, 불러올 때마다 새롭게 조합되는 재구성의 방식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개인의 기억은 각기 다른 형태로 변형되며, 사건을 공유한 사람들조차 서로 다른 장면을 떠올리곤 한다. 이러한 이유로 공동체가 함께 기억해야 할 역사와 정신은 더욱 분명한 방식으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심리학자 헤르만 에빙하우스의 ‘망각곡선’은 이러한 사실을 과학적으로 보여준다.

새로운 정보를 접한 뒤 불과 몇 분 만에 기억의 절반을 잊고, 하루가 지나면 그 흔적의 대부분이 희미해진다는 그의 연구는, 기억이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감소함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러나 개인의 망각은 생리적 현상이지만, 공동체의 기억 상실은 정체성의 흔들림으로 이어지는 사회적 문제다. 그래서 공동체는 질문해야 한다. 우리는 무엇을 잊지 않기 위해 어떤 방식으로 기억해야 하는가·

공동체의 기억을 온전히 유지하는 일은 개인의 기억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일이다.

특히 역사적 진실과 민주주의의 가치를 지켜온 도시라면 더욱 그렇다. 개별 기억의 한계를 넘어 공동체적 기억을 가능하게 한 힘은 시민들이 함께 판단하고 행동해온 연대의 경험, 즉 집단지성이다. 광주는 바로 그 집단지성의 힘으로 공동체의 기억을 지켜내며 오늘에 이른 도시다.

1980년 5월의 비극과 항쟁은 단순한 사건을 넘어 광주라는 도시의 정체성을 이루는 근원적 기억이다. 국가 폭력 속에서도 시민들은 서로를 지키고, 사실을 기록하며, 진실을 증언함으로써 공동체의 기억을 스스로 구축했다. 5·18은 상처의 기록이 아니라, 광주 시민의 연대·책임·집단지성이 응축된 기억의 형식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어떤 기억도 희미해지기 마련이다. 세대가 바뀌면 과거의 긴박함과 감정의 온도도 자연스럽게 옅어진다. 그래서 공동체는 다시 질문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무엇을 잊지 않기 위해 어떤 방식으로 기억을 이어갈 것인가· 기억을 강요하거나 박제하는 대신, 보다 우아하고 인간적인 방식으로 기억을 되살리는 길이 필요하다. 예술은 추상적 기억을 감각과 서사로 바꾸어, 과거의 감정이 오늘의 관객 안에서 다시 호흡하도록 만드는 힘을 갖는다. 그리고 그 우아한 기억의 방식을 가능하게 해온 것이 바로 예술이었다.

이 점에서 최근 공연된 뮤지컬 ‘시민군 윤상원·님을 위한 행진곡’은 광주의 기억이 예술이라는 형식을 통해 어떻게 다시 살아 움직일 수 있는지를 보여준 귀중한 성과였다. 이 작품은 광주문화재단의 광주문화자산콘텐츠화제작지원사업을 통해 제작되었으며, 공공의 지원이 지역의 역사·인물을 동시대의 예술로 재탄생시키는 데 어떤 역할을 하는지 모범적으로 증명했다.

윤상원과 박기순, 두 청춘의 삶은 짧았지만 뜨거웠다. 뮤지컬은 이들을 영웅으로 신화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흔들리고 고민하면서도 시대의 질문에 응답했던 평범한 인간의 용기를 섬세하게 복원한다. 이는 대본을 쓴 전용호 작가의 생애와 깊이 맞닿아 있다. 실제로 들불야학에서 윤상원·박기순과 함께했고, 5·18 당시 투사회보 제작으로 투옥되었으며, 이후 노래극 ‘넋풀이·빛의 결혼식’ 제작에도 참여한 그는, 현장에서 체득한 기억의 진실성을 글 속에 담아냈다.

정유하 작곡가는 5·18의 정서를 현대적 뮤지컬 문법으로 재해석하며 세대 간 감정의 간극을 우아하게 메웠다. 민중가요의 뿌리를 간직하되 오늘의 관객이 자연스럽게 호흡할 수 있도록 구성한 음악들은, 과거의 감정이 현재의 몸 안에서 다시 살아 움직이게 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이 작품의 완성도가 창작자 개인의 역량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기획·대본·작곡·연출까지 전 과정을 뒷받침한 광주문화자산콘텐츠화제작지원사업이 있었기에 가능한 성취였다. 이 제도는 예술가가 지역의 문화자원을 깊이 들여다보고 해석하며 창작할 수 있도록 하는 문화정책적 기반이다.

‘시민군 윤상원-님을 위한 행진곡’은 이러한 제작지원사업이 왜 지속되고 확대되어야 하는지를 스스로 증명한 작품이다. 광주는 풍부한 문화자산을 갖고 있지만, 이를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해 시민과 청년 세대가 일상에서 체감할 수 있는 콘텐츠로 확장하는 체계는 아직 충분히 구축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지속가능한 상설 공연 콘텐츠가 뿌리내리지 못해, 광주의 문화자원이 삶의 결로까지 스며들 기회가 제한적이다. 지속적인 제작지원은 광주를 ‘기억을 보존하는 도시’에서 ‘기억을 창조적으로 재생산하는 문화도시’로 이끄는 핵심 동력이 될 것이다.

공연의 마지막 장면, 배우와 관객이 함께 부른 ‘님을 위한 행진곡’은 공연의 모든 의미가 집약된 결말이었다. 그 순간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기억이 서로를 비추며 만나는 연대의 시간이었다. 무대 위에서 되살아난 그 기억은 잠시나마 우리 모두를 같은 감정선 위에 세우며, 이 도시가 무엇을 잊지 말아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일깨워주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창작 공연을 꾸준히 지원하고 도시의 문화적 자산으로 성장시키는 일은 지방정부 시대에 더욱 중요한 과제가 된다.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발굴해 콘텐츠로 확장하는 이러한 시도가 앞으로 더 큰 힘을 얻어, ‘시민군 윤상원-님을 위한 행진곡’이 광주를 대표하는 진정한 브랜드 공연으로 오래도록 자리매김하길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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