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대자보 도시 광주의 조건

신석기 광주지속가능발전협의회 회복력도시 협력국장

광남일보@gwangnam.co.kr
2025년 12월 16일(화) 11:26
신석기 광주지속가능발전협의회 회복력도시 협력국장
2023년 가을 광주시는 ‘대중교통·자전거·보행 중심도시’, 이른바 ‘대자보 도시’로의 전환을 선언했다. ‘걷고 싶은 길’ 100개를 조성해 시민이 직접 걷는 경험을 통해 도시의 변화를 체감하고 참여하도록 하는 것이 그 출발점이었다. 이후 광주는 대중교통, 자전거, 보행 중심의 교통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며 사람 중심 도시로의 전환을 이어가고 있다.

대자보 도시와 걷고 싶은 길의 사업은 단순히 인도를 정비하거나 확장하는 물리적 환경을 개선하는 것이 아니다. 속도와 효율을 추구하는 자동차 중심의 도시에서 안전·건강·삶의 질을 제고하는 사람 중심의 도시로, 우선순위와 도시설계 철학을 바꾸겠다는 의지이다. 이러한 정책의 효과를 실질적으로 거두기 위해서는 ‘보행이 기본이 되는 도시’라는 개념이 도시 정책 전반에 스며들어야 한다.

현재 광주의 보행 환경은 시민들에게 불편하고 위험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인도를 가로막는 전신주와 불법 주정차, 인도 위를 질주하는 오토바이, 곳곳에서 끊긴 보행로, 공사현장의 무단 점유 구간, 불법 광고물과 적치물 등은 보행자의 안전을 위협한다. 이러한 문제는 특히 고령자, 장애인, 어린이, 유아차 이용자에게 더 큰 위험요소로 작용한다. 자동차 중심의 도시 체계 속에서 보행자의 안전권은 위협받고, 이동권을 보장받기 어렵다.

도시의 모든 교통은 사람의 한 걸음, 즉 보행에서 시작된다. 어떠한 교통수단을 이용하더라도 보행은 출발점이자 종착점이다. 이는 곧 도시를 살아가는 모든 시민이 보행자임을 뜻한다. 집을 나서 버스나 지하철을 이용하기까지, 목적지에 도착해 최종 장소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이동은 결국 ‘걷기’로 완성된다.

따라서 보행은 단순히 교통체계의 한 부분이 아니라, 도시 생활의 토대이자 반드시 보장되어야 할 인간의 기본권으로 다뤄져야 한다.

앞으로 광주는 ‘보행이 기본이 되는 도시’로 나아갈 수 있을까?

이는 단순히 보도를 정비하는 차원을 넘어, 도시의 구조와 교통체계, 그리고 시민의 일상적 이동 방식을 사람 중심으로 재편하는 종합적 전환을 의미한다.

첫째, 시민 참여형 정책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인도 위 불법 주정차나 상가의 인도 점유 문제는 단속만으로 해결되기 어렵다. 주민과 상인, 행정이 함께 협의하고, 보행을 도시의 기본권이자 공공의 가치로 인식하는 지역 공동체 중심의 보행 문화를 만들어가야 한다.

둘째, 보도 설치 기준을 한층 강화할 필요가 있다. 현행 국토부 ‘보도 설치 및 관리지침’에서는 보도의 유효폭을 최소 2.0m(불가피한 경우 1.5m)로 규정하고 있지만, 실제로 많은 구도심은 이 기준조차 충족하지 못한다. 그 결과 휠체어나 유아차는 물론, 두 사람이 나란히 걷기도 어려운 구간이 여전히 존재한다. 보행이 기본이 되는 도시를 만들기 위해서는 이러한 구조적 한계를 개선할 수 있도록 광주형 보도 기준의 상향과 단계적 정비 계획이 필요하다.

셋째, 도로 설계 단계에서의 근본적인 발상 전환이 필요하다. 그동안은 차량 흐름을 우선시하고, 남는 공간을 인도로 배치하는 방식이 관행처럼 이어져 왔다. 그러나 보행이 기본이 되는 도시를 지향한다면 앞으로는 보행 동선을 먼저 설정하고, 그에 맞춰 차로를 조정하는 ‘보행 중심 설계’가 이뤄져야 한다. 이는 단순한 배치의 변화가 아니라, 도시가 무엇을 우선 가치로 두는지에 대한 방향 전환을 의미한다.

넷째, 생활권 단위의 보행환경 전수조사와 데이터 기반의 개선 체계가 구축돼야 한다. 시민들이 일상에서 겪는 불편을 정기적으로 수집·분석하고, 위험도와 필요도에 따라 우선순위를 설정해 단계적으로 개선하는 지속 가능한 관리 시스템이 필요하다. 이는 보행환경을 일시적 사업이 아닌, 도시 운영의 핵심 기능으로 자리 잡게 하는 과정이다.

다섯째, 광주의 보행 정책은 단순한 인프라 정비를 넘어 ‘15분 도시’ 개념과 연계해 보행 중심의 생활권으로 확장돼야 한다. 학교, 공원, 병원, 대중교통 정류장 등 주요 생활 시설을 안전하고 쾌적한 보행 네트워크로 연결하고, ‘어린이·노약자 보호구역’에 대한 속도 제한, 보행 전용 시간대 확대 등 실질적 안전성을 강화해야 한다. 또 단절된 인도를 잇고, 불합리한 경사와 단차를 제거하며, 보행자 신호 시간을 현실적으로(교통약자 보행 속도 고려) 조정하는 세밀하고 인간 중심적인 행정이 뒤따라야 한다.

광주가 진정한 ‘대자보 도시’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걷기 좋은 도시’가 단순한 구호에 그치지 않고, 행정과 시민이 함께 만들어가는 공동의 실천 과제가 돼야 한다. 보행은 가장 오래된 이동 수단이지만, 동시에 가장 미래지향적인 교통수단이다. 자동차보다 사람이 우선되는 도시, 걷는 일이 불편이 아닌 일상이 되는 도시, ‘걷기 좋은 도시 광주’가 바로 지속 가능한 도시의 새로운 기준이 될 것이다.

결국 도시의 미래는 사람의 발걸음에서 완성된다. 이제 광주는 그 기본을 다시 세워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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