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시학과 소통방식

강경호 '시와사람' 발행인·한국문인협회 평론분과 회장

광남일보@gwangnam.co.kr
2025년 12월 24일(수) 17:06
강경호 시인(‘시와사람’ 발행인·한국문인협회 평론분과 회장)
[문화산책]관계의 시학은 본래 블레이크, 예이츠, 하리의 관계를 시학적 관점에서 고찰하며, 각 작품에 나타난 작가 간 변화를 통해 시를 총체적으로 이해하려는 방법론이다. 이러한 관점에 비추어 필자는 오늘날 우리 사회에 드러난 관계성, 나아가 인간과 사물 사이의 관계성에 대해 논의를 전개하고자 한다.

현재 우리 사회는 급속도로 분열되고 있으며, 이는 국가 통합과 화합의 측면에서 매우 우려스러운 상황이다. 자신의 생각만이 옳다는 확신 아래 상대의 주장을 폄훼하는 일이 서슴없이 이루어지고, 상대는 대화의 대상이 아니라 공격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반대를 위한 비난이 일상화된 것이다. 과거 민주화 과정에서는 이념을 둘러싼 갈등이 중심이었다면, 지금은 진영논리가 앞서고 있다. 이는 소신에 따른 신념의 실천이라기보다, 철저히 이익을 위해 상대를 쓰러뜨려야 할 적으로 간주하는 태도가 지배적임을 보여준다.

이러한 현상은 정치 영역에 국한되지 않고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어 더욱 문제적이다. 선거를 떠올려보면, 어떤 선거이든 결과는 오직 승자와 패자로 나뉜다. 승자는 마치 전쟁에서 승리한 무사처럼 상대를 괴멸시키려 하고, 이를 전리품처럼 여겨 논공행상을 일삼는다. 그 결과 화합은 요원해지고 분열은 더욱 가속화된다.

그럼에도 집단지성은 아직 우리 사회에 남아있다. 역사는 최후의 승자가 언제나 대다수의 국민이었음을 증명해왔다. 그 과정이 그다지 순탄하지만은 않았으나, 정의로움은 결국 선(善)과 손을 맞잡아 왔다. 우리의 근현대사는 이를 분명히 보여준다.

지난해 12·3 내란이라는 초유의 사태가 있었지만, 불과 6개월 만에 새로운 민주 정부가 들어섰고 광주문인협회와 전남문인협회의 선거도 치러졌다. 다행히 극한의 분열로까지 치닫지는 않았다. 현재 우리는 이재명 정부를 지켜보고 있다. 아직 다소의 불협화음은 있으나, 우려할 만한 시행착오라고 보기는 어려워 전반적으로 긍정적인 흐름이라 할 수 있다. 문학 단체들 또한 축제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회장 선거를 치러낸 점은 고무적이다. 각 단체의 장들은 임기 동안 공동체가 더욱 발전하고 화합할 수 있도록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다.

이 지점에서 필요한 논의는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고 유지하며 맺어갈 것인가에 관한 문제다. 우리는 선거에서 승리한 정치인이나 행정가, 단체장들이 과거에 자신들과 경쟁했던 상대를 어떻게 대했는지를 잘 알고 있다. 상대를 배제하고 논공행상을 반복해 온 것이 그간의 폐해였다. 특히 선거 공신들이 국가와 단체를 사유화하듯 좌지우지하는 일은 반드시 경계되어야 한다.

관계란 사람이나 사물, 혹은 현상이 서로 관련을 맺고 있음을 의미한다. 문인은 자신의 작품세계를 홀로 구축해 나가는 고독한 존재다. 그러한 문인들이 모여 이룬 것이 문학공동체이다. 개별 예술가는 누구의 도움도 대신 받을 수 없지만, 문학공동체는 보다 대의적인 차원에서 구성원들의 권리와 이익을 도모하고, 새로운 문학적 화두를 실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길가에서 흔히 마주치는 전봇대를 볼 때마다 문학청년 시절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술에 취한 후배가 전봇대를 집인 줄 알고, 전공들이 오를 때 사용하는 발디딤쇠를 옷걸이처럼 여겨 옷을 걸어둔 채 전봇대에 기대 잠들곤 했다. 또 문단의 한 원로 시인은 술에 취하면 개처럼 전봇대에 오줌을 누곤 했는데, 이를 두고 누군가는 그를 ‘개’라 부르기도 했다.

수십 년이 흐른 오늘, 다시 전봇대를 바라보며 나는 ‘관계’에 대해 새롭게 생각하게 된다. 개는 전봇대에 다가와 냄새를 맡고 오줌을 누고 떠난다. 전봇대 주변에는 각종 쓰레기 봉지가 놓여있고, ‘위험’이라는 붉은 글씨의 푯말이 붙어 있다. 그 옆에는 바람에 노란 잎을 흩날리는 가을 은행나무가 서 있다.

그러나 전봇대에 오줌을 누고 가는 개와 전봇대 사이에는 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 개는 냄새를 맡고 지나갈 뿐, 그 흔적조차 기억하지 않는다. 쓰레기 봉지와 전봇대 사이에도 관계는 없다. 오랫동안 같은 자리에 서 있었던 전봇대와 은행나무 역시 소통하지 않기에 관계라 부를 수 없다. 전봇대에 붙은 ‘위험’이라는 경고를 인지한 것은 나뿐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와 전봇대 사이에 관계가 형성되는 것도 아니다. 나는 그저 전봇대의 상황과 누군가의 경고를 인식했을 뿐이다.

하지만 전봇대에 올라 작업하는 전공들과 전봇대의 관계를 떠올려본다. 가뭄에 은행나무에 물을 주고, 겨울마다 가지치기를 해온 사람들과 은행나무의 관계도 생각해본다. 전봇대와 은행나무는 인간과 직접 소통하지는 못하지만, 그것을 일터로 삼고 돌보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수많은 사유를 거쳤을 것이다. 전봇대는 전기를 전달하는 다리가 되고, 은행나무는 도시의 풍경 속에서 생명의 푸르름을 더한다.

전공과 나무를 돌보는 이들의 마음이 깃든 전봇대와 은행나무가 있는 도시 변두리의 풍경 속에서 나는 관계를 사색한다. 세상의 모든 사물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관계를 맺으며 서로를 지탱한다. 존재는 서로 마주하고 소통할 때 비로소 의미를 얻는다. 소통하지 못한 채 경계만을 세우거나 완결된 닫힘으로 남는다면, 그 존재 가치는 희미해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시를 쓰는 나 역시, 인간의 삶을 올바른 ‘관계의 시학’으로 바라보며 세계를 사유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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