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효와 충’ 꽃피운 의병장 최대성 삶 되살리다 정찬주, 임진왜란 호남명장수 시리즈 6번째 소설
고선주 기자 rainidea@gwangnam.co.kr |
| 2025년 12월 26일(금) 18: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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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찬주 소설가 |
저자인 소설가 정찬주씨가 임진왜란 호남명장수 시리즈 6번째 소설로 펴낸 장편 ‘대장부의 꿈’이 그것으로, 여백출판사에서 최근 출간됐다. ‘임란 때 충(忠)과 효(孝)를 다한 최대성 모의장군 이야기’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장편은 무과 급제를 하고 한양의 훈련원 참군을 지냈으나 왜구들의 노략질이 빈발하자 고향 보성을 지키고자 귀향하는 결단을 내리는 최대성의 의기를 엿볼 수 있다.
저자가 보성군민과 보성군수로부터 제안을 받아 보성군 누리집에 2025년에 10개월 동안 연재한 소설작품이다. ‘대장부의 꿈’은 무과급제하고 고향으로 가던 중 금강에서 스스로 맹세하며 지은 시 ‘붓을 놓은 서생이 한번 벼슬길에 나서니/푸른 하늘, 큰길에도 흙먼지 날리는구나/대장부가 어찌 향리에서 늙을 수 있으리/바람타고 왜구 물리칠 것을 맹세하노라’에서 차용했다.
소설이어서 허구로만 치부할 수는 없다. 저자는 줄곧 그래왔지만 이번 소설 역시 관련 자료수집을 위해 발품을 파는 것을 아끼지 않았을 뿐 아니라 현장 답사 등을 통해 팩트에 기반해 작품화하는데 집중했다.
여전히 최대성이라는 의병장이 눈에 익지는 않지만 그가 얼마나 의로운 인물이었는가를 소설 속에서 얼마든지 감지할 수 있다.
임진왜란의 전운이 돌자 최대성은 이순신 장군 휘하로 들어가 전라좌수군의 한후장과 최측근 대솔군관으로 전공을 세운 인물로, 조선 수군이 첫 승리를 거둔 옥포해전을 필두로 다섯 차례의 해전에 출전해 이순신의 승리에 기여했다고 한다. 최대성은 고향에 돌아와 의병장으로 항전하다가 순절, 보성 의병사에 빛나는 장수로 알려져 있다.
그는 충과 효의 사상을 실천한 장수로 효에서 충을 일으켜 나라를 구하고 고향을 지킨 한국인의 정체성을 구체화하는 작업으로 받아들여진다.
작가는 그의 일대기를 영웅주의적 관점이 아니라 가능한 한 ‘인간 최대성’으로 그려내려는데 집중했다. 특히 왜적에 맞서 고향을 지키려다 순절한 충절의 장수들은 의외로 많지 않은 상황 속 누구보다 고향을 사랑했던 최대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고심한 흔적도 엿보인다.
부모에 대한 지극한 효심, 스승에 대한 순수한 존경심, 병사한 아내를 향한 절절한 슬픔, 전투에서 겪는 인간적인 고뇌와 전우애, 그리고 반상의 경계를 뛰어넘어 집안의 가노와 형제처럼 지내는 인간미 등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최대성은 서른두 살에 전주감영에서 치른 무과 초시에 합격, 이듬해 한양 훈련원 복시에 나가 활쏘기와 검술에서 우수한 성적을 올려 무과에 급제했다. 훈련원의 정7품 참군으로 있던 최대성은 선조 18년 2월 왜구들의 침탈이 극심하자 고향을 지키고자 입신양명의 길을 뒤로한 채 귀향을 결심한다.
이순신이 전라좌수사로 부임하자 열선루 회동에 참여하고, 뒤이어 선조 25년(1592) 3월 초 전라좌수영에 들어가 전쟁이 발발하자 첫 전투인 옥포해전에 참전하는 등 다섯 차례의 해전에 나가 승리를 거둔다.
최대성은 고향 일대에 출몰하는 흉적을 물리치고 종사를 보전하겠다는 뜻으로 임금에게 사직을 청한다. 하지만 선조는 정3품 훈련원정에 제수하며 그 공을 치하한다.
그러나 선조 30년(1597) 2월, 이순신이 참소당해 한양으로 압송되자 최대성은 고향으로 돌아와 보성향보의병군을 조직하고 왜적에 대항한다. 이순신이 28일 만에 의금부에서 풀려나 백의종군하게 되자 최대성은 이순신의 명을 받아 전라좌수군의 배후인 고향을 지키는 임무를 받는다.
1597년 보성향보의병군을 일으킨 최대성은 순천만 거차포전투와 안치전투 등 20여 회의 크고 작은 전투에서 왜적들을 물리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안치전투에서 적탄에 장렬하게 순절한다. 그의 나이 46세였다.
7년 전쟁이 끝난 뒤 최대성의 장남 언립과 삼남 후립은 선무원종 2등 공신에 책록됐으나 정작 최대성은 아무런 예우를 받지 못했다. 최대성의 전공 회복운동은 안방준 이후 최대성의 5대손 최정기가 영조 27년(1751) 예조에 올린 소지(所志, 진정서)에 이르기까지 100여 년 동안 계속됐다. 결국 영조는 최대성의 향리에 충신 정려(旌閭)를 세우라는 명과 함께 증(贈) 통정대부 형조참의 증직교지를 내렸다. 통정대부란 정3품 상계(上階)로서 당상관의 품계였다. 안치전투에서 순절한 지 154년 만에 내린 왕명이었다.
이후 영조 44년(1768) 유림의 발의로 정유재란시 안골포, 가덕도해전에서 전사한 보성군수 안흥국의 정충사에 배향됐다가, 현재는 모의장군의 전적지 죽전들판과 안치들이 가까운 충절사에 위패가 봉안돼 있어 오가는 사람들의 마음에 대장부 최대성 장군의 혼이 불현듯 충절과 효심을 불러일으켜 주고 있다는 설명이다.
저자는 이 장편에 대해 “보성이 의향임을 밝히고 그 위상을 재조명하는 차원의 소설인데, 보성군 복내면에서 태어난 작가로서 숙제를 했다는 생각에 기쁨이 크고 뿌듯하다”면서 “효와 충을 꽃피운 모의장군 최대성 장군을 잊지 않기를 부탁드린다. 효심과 충심은 한국인의 정체성이자 결코 잊어서는 안될 덕목이기에 더욱 그렇다”고 밝혔다.
고선주 기자 rainidea@gwangna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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