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 아니고선 세계를 깊이 알 수 없다

백승현 대동문화재단 전문위원

광남일보@gwangnam.co.kr
2026년 01월 22일(목) 18:28
백승현 대동문화재단 전문위원
[문화산책] 그녀의 왼손 검지가 천천히 왈츠를 추기 시작한다. 색연필을 쥐고 그림을 그린다. 그가 움직일 수 있는 건 왼손 검지뿐이다. 손가락을 움직여 가닿을 수 있는 10cm 정도까지가 도화지에 그가 그을 수 있는 선의 한계 지점이다. 그 한계 안의 선이 모이고 모여서 형태가 되고 색깔이 된다. 화면에 채워진 선과 형태와 색깔이 모여 때론 암울하고, 때론 희망찬 그림이 그려진다. 그는 장애인 화가다.

그림을 그리다가 지치면 컴퓨터 앞에 앉아 왼손 검지로 자판을 눌러가며 시를 쓴다. 자판 사이사이를 옮겨갈 때 시간이 많이 걸린다. 수없이 반복하며 머릿속에 쓰고 지운 이미지들과 시어와 시의 맥락을 힘겨운 동작들로 조합해 나간다. 느리지만 모음과 자음이 하나 조립되고, 한 땀 한 땀 시어가 모여 시가 완성된다. 모든 삶의 하루하루를 그이는 그림과 시로 바꾼다.

‘창가에서 바람을 보고 있습니다. 다시 휘날리는 법을 가르치는 바람을 보고 있습니다.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어두워지는 창가에서 툭 소리가 더욱 귀청을 울리는 나도 바람이 되고 싶습니다.’

누구든 바람이 되고 싶지 않겠는가? 황신애 시인은 육십대 초반. 고향은 완도군 완도읍 장좌리. 장보고의 청해진이 설치됐던 곳이다. 완도에서 자랐다. 호남예술제에 그림을 출품해 상을 받기도 했고, ‘새농민’ 잡지 수필 공모에 당선되기도 했던 꿈 많은 소녀였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광주로 나와 2남 1녀가 서로 기대며 살았다. 직장에 다니기도 하고 결혼해 딸 둘을 낳고(김예지·예선) 남편의 사업을 도우며 평범한 주부로서 삶을 살았다.

2003년 40살 때 갑자기 쓰러져서 2004년 ‘다발성 경화증’이라는 병 판정을 받게 됐다. 희귀 질병으로 원인 불명이고, 운동 장애 심지어는 사지 마비에 이르게 된다. 난치 질환으로 스테로이드 정맥주사와 베타페론 주사가 병을 잠시 멈추게 할 뿐이었다.

7번의 재발을 반복했다. 무력증과 머리를 찌르는 통증으로 쓰러졌다가 병원에 실려가 다시 회복되는 일이 반복됐다. 점점 마비되는 자신의 몸을 자신이 받아들일 수 없었다. 분노와 절망과 체념이 반복됐다. 집안에서 요양보호사의 도움 없이는 움직이지 못한 채 누워 지냈다.

2014년 세월호 사건이 터졌다. 뉴스를 보면서 세월호 아이들의 죽음이 침대에 누워있는 자신과 동일시되는 경험을 했다. 세월호 아이들이 마지막 죽음의 순간을 맞았을 숨 막히는 바다에서의 그 차가운 몸부림을 상상하자, 그이에게 참을 수 없는 고통이 찾아왔다.

저 아이들의 죽음은 무엇이고, 내 존재를 부정하며 고통스러워하는 나의 실존을 무엇이어야 하는가? 이렇게 살아선 안 되겠다 싶었다. 갈수록 마비와 진통이 진행되는 엄마를 본 첫째 딸이 작은 공책을 가져다주면서 거기에 그림을 그려보라고 꼬드겼다. 신부님들과 수녀님들이 한 달에 한 번 찾아와 봉성체를 해주신 것도 생의 불꽃을 지피는 데 도움이 됐다.

그동안 닥치는 대로 읽었던 책들이 상상력에 많은 도움이 됐다. 목표가 생기니 하루가 짧게만 느껴졌다. 작은 국판 변형 노트를 가로로 놓고 아래쪽을 모로 뉘어 그림을 그렸다. 주로 자신에게 용기를 주는 인물들을 그리고 그 위에 그들의 명언을 적었다. 카프가, 하이데거, 이백, 월트 휘트먼, 베르톨트 브레히트, 니코스 카잔차키스, 닉 부이치치를 읽고 그들과 대화했다.

“인간은 매우 자주 슬픔에 빠지지 않고는 세계에 대해 깊은 해답을 얻을 수 없다.”(에리히 프롬) “사흘만 볼 수 있다면 사흘만 걸을 수 있다면”(헬렌 켈러)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터질 것 같은 이내 마음을”(두 딸을 그리고 나서)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는 동백꽃으로 그렸다.

왼손 검지를 천천히 움직여 1만 번 최고는 3만 번 이상의 획을 그려 3일에서 5일 정도면 작은 그림이 하나 완성됐다.

시와 스케치를 모아 2015년 6월 시화집 ‘모로’를 출간했다. 표지도 직접 그렸다. 위쪽으로 넘기는 ‘가로매기’ 방식의 책을 기획했다. ‘모로’ 누워 있는 바닷속 인어 같은 자신의 모습을 표지로 그렸다. 늘 옆으로 누워서 지내야 하는 자신의 자화상이었다.

땅속의 매미처럼 엎드려 있다가 쓴 시가 ‘책상의 한’으로 2017년 1월 제26회 대한민국장애인문학상 운문부 대상을 받았다. 2017년 11월에 두 번째 나온 책은 광주복지재단 장애인 복지 사업인 ‘달팽이지기’ 활동에 참가하게 되면서 쓴 시와 그림을 엮은 ‘파란 달팽이’였다.

2022년 6월에는 제5회 곽정숙 인권상을 받았다. 장애인활동법이 위헌이라는 대법원 판결을 이끌어내 전국의 같은 처지의 3만여 명에게 의료 혜택을 제공한 공헌을 인정받았다.

인터뷰를 끝내고 내가 휠체어에 앉은 그이에게 말했다.

“내년에 새로운 시화집을 내고 그림 전시도 해보세요. 그러면 희망의 에너지가 샘물처럼 솟아날 겁니다.”

대답을 듣지 못한 기약을 그이는 지키려고 무던히 애썼나 보다. 연초에 그는 다시 내게 연락을 해선 올해 5월에 시화집을 낼 원고를 다 써놓았다고 했다. 겨울 내내 그려온 작품들로 전시회를 하겠다는 용기를 굳혔다고 말했다.

올해 봄 그녀의 새로운 시화집을 볼 수 있게 된다. 그이의 생애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 작은 전시회도 개최된다. 그래서 그의 작품들은 그와 같은 처지의 장애인들에게, 아니 더 강렬하게는 정상인들에게도 깊은 감명을 주게 될 것이다. 그이의 책과 그림들은 ‘살아있음에 대한 찬사와 생명의 불씨를 피워 올리는 인간 실존’이라는 존재론적인 질문을 통해 우리를 되돌아볼 수 있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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