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조선 불교계까지 전쟁 동원·착취 일삼아"

심정섭 명예관장, 전남 해남 대흥사 주지 편지 공개
승려들 농번기 강제노역 내용 담겨…거부하면 처벌

임영진 기자 looks@gwangnam.co.kr
2026년 02월 01일(일) 09:00
민족문제연구소 지도위원이자 식민지역사박물관 명예관장인 심정섭씨가 1일 전남 해남 대흥사 승려 근로보국대 동원과 관련된 자료 1점을 본보에 공개했다. 가로 5.5㎝, 세로 9㎝ 크기의 우편엽서 형식 편지로, 대흥사 주지 혁전원웅(赫田元雄·본명 박영희)이 해남군 삼산면장 송택진옥(박진옥)에게 보낸 것이다. 최기남 기자 bluesky@gwangnam.co.kr
일제가 태평양전쟁 수행을 위해 조선 사회 전반을 총동원하는 과정에서 불교계까지 강제 동원했던 실상이 당시 문서를 통해 확인됐다.

승려들은 농번기마다 연 2차례, 한 달가량 근로보국대로 끌려갔고, 동원을 거부할 경우 일본 순사가 동행해 체포하거나 징역형을 부과하는 등 강압적인 처벌이 뒤따랐다.

1일 민족문제연구소 지도위원이자 식민지역사박물관 명예관장인 심정섭 사백(83·광주 북구)은 전남 해남 대흥사 승려 근로보국대 동원과 관련된 자료 1점을 본보에 공개했다.

이는 가로 5.5㎝, 세로 9㎝ 크기의 우편엽서 형식 편지로, 대흥사 주지 혁전원웅(赫田元雄·본명 박영희)이 해남군 삼산면장 송택진옥(박진옥)에게 보낸 것이다.

편지에는 근로보국대 강제 편성으로 인해 사찰이 떠안게 된 식량 공출 부담과 그로 인한 극심한 곤란이 적나라하게 담겼다.

혁전원웅은 “근로보국대원 1인당 쌀 3승(3되·4.8~5.4㎏)을 공출해야 한다고 하나, 저의 사찰 형편으로는 그 양조차 몹시 어려운 실정”이라며 “이에 특별한 배려가 있기를 바란다”고 호소했다. 이는 근로보국대원이 ‘식량을 지급받는’ 구조가 아니라, 오히려 사찰과 지역이 전쟁 수행을 위해 쌀을 상납해야 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문서의 작성 시점은 1944년 봄 이후로 추정된다. 같은 해 4월10일 조선불교 조계종 종무총장 이종욱이 전국 31본사 주지에게 ‘조선불교 근로보국대’ 편성에 관한 공문을 발송한 사실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이후 각 사찰은 승려를 근로보국대에 편입시키는 것은 물론, 동원 인원에 비례한 식량 공출까지 떠안았다.

근로보국대는 1937년 중·일 전쟁 이후 일제가 전시 총동원 체제를 구축하며 만든 강제 노역 조직이다. 1938년 학교 근로보국대를 시작으로 대상은 12세 이상 40세 이하 전 조선인으로 확대됐고, 태평양전쟁 이후에는 종교계까지 동원 대상에 포함됐다. 특히 승려들은 봄·가을 농번기에 맞춰 연 2차례, 약 한 달씩 도로 개설, 군수 시설 정비, 산림 작업 등 각종 전시 노역에 강제로 투입됐다.

동원은 ‘자발’이 아닌 명백한 강제였다. 출역 통지에 불응할 경우 일본 순사가 동행해 강제로 끌고 가거나 체포·구금됐고, 징역형 등 형사 처벌이 이뤄졌다. 불교계 역시 예외 없는 전시 통제 체계 안에 놓였던 셈이다.

편지를 작성한 혁전원웅은 복합적인 인물이었다. 전남 완도 출신인 그는 1930년대 초 한용운 대선사가 조직한 항일 비밀결사 ‘만당(卍당)’에 참여했고, 1938년 일본 경찰에 체포돼 혹독한 고문을 당한 이력도 있다. 그러나 중·일 전쟁 이후 친일로 전향해 대흥사에서 ‘국위선양·무운장구 기원 법요식’을 열고 국방헌금과 군용기 헌납 운동에 앞장섰다. 이후 조선불교 조계종 종무원 이사를 맡아 일제의 전쟁 동원 정책에 협력했다.

광복 후 그는 건국공로훈장을 받았으나, 친일 행적이 드러나 2011년 국가보훈부에 의해 서훈이 취소되고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됐다.

심정섭 명예관장은 “근로보국대는 노동 동원을 넘어 식량 공출과 사상 통제를 결합한 전시 수탈 시스템이었다”며 “승려들마저 농번기에 반복적으로 강제동원되고, 그 인원만큼 쌀을 바치도록 한 구조는 일제 수탈이 종교 영역까지 깊숙이 침투했음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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