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남초대석] 이인곤 광산이씨 도문중 종회장

"필문 이선제 선생, 조선 단종 스승이자 광주 빛낸 인물"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재조명…고려사·태종실록 편찬 참여
광주목 복권 앞장·광주향약 창안…호남 대표 사림 ‘우뚝’
남광주사거리~서방사거리 필문대로 명명…정신 기려

송태영 기자 sty1235@gwangnam.co.kr
2026년 06월 15일(월) 18:32
이인곤 광산이씨 도문중 종회장은 “이선제 선생은 단종의 스승으로 무진군으로 강등된 광주를 광주목으로 복호시키는데 주도적 역할을 하고 향약을 설행(設行)해 풍속을 순화하고 인재를 키운 광주를 빛낸 대표적 역사적 인물이다”고 말했다. 최기남 기자 bluesky@gwangnam.co.kr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누적 관객수 1686만명을 돌파하며 우리나라 역대 영화 관객수 2위를 차지하며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이 영화는 숙부 수양대군(세조)에 의해 왕의 자리에서 쫓겨나 강원 영월로 유배간 단종과 그의 시신을 수습하며 마지막까지 충절을 지킨 영월 호장(戶長) 엄흥도, 그리고 당시 영월 백성들의 인간적인 모습을 담았다.

영월 유배, 단종복위운동 등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해 만든 이 영화는 그동안 어리고 나약한 이미지로 그려졌던 단종을 진취적이고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컸지만 아무런 힘도 없고 언제 어떻게 될 지 모르는 폐위된 왕으로서의 고뇌에 찬 삶, 그리고 이를 안타깝게 지켜보는 주민들의 심정을 묘사해 관객들을 사로 잡았다.

이런 영화의 기세는 단종의 유배지인 영월과 영화 촬영지인 문경새재를 찾는 관광객까지 증가하는 효과로 이어졌으며 죽음으로 단종을 지킨 사육신 등 단종과 연관이 있는 인물들에 대한 관심도 증폭되고 있다.

여기에서 당시 단종의 스승으로 예문관제학을 지냈던 필문 이선제(李先齊, 1389~1454) 선생이 재조명받고 있다.

그와 단종과의 인연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그의 후손인 광산 이씨 종친회와 광주역사문화자원스토리텔링에서 그의 이야기가 실려 있는 정도다.

이인곤 광산이씨 도문중 종회장은 “이선제 선생은 세종 1년 문과에 급제한 후 사관, 집현전학사로 재직하면서 태종실록, 고려사, 고려사절요 편찬 등에 참여했고 호조참판과 예문관 제학을 지내고 단종이 어린 세자 시절 그의 교육을 담당한 스승이었다”고 말했다.



필문대로 표지석


이인곤 종회장은 이어 “이 선생은 세종 24년인 1442년에는 첨사원 동첨사를, 문종이 즉위한 1450년에는 세자우부빈객의 관직을 맡았다”면서 “첨사원동첨사는 세종이 세자인 문종이 섭정할 수 있도록 설치한 첨사원의 부수장이고 세자 우부빈객은 바로 다음 임금이 되는 단종을 교육하는 관직이었다”고 덧붙였다.

당시 상황을 살펴보면 각종 질환을 겪고 있던 세종이 1442년부터 모든 정사를 세자인 문종에게 맡겼고, 섭정에 필요한 첨사원을 설치했다. 8년여의 섭정을 끝내고 왕으로 등극한 문종은 3년도 채 채우지 못하고 39세의 나이로 병사했고 이후 어린 세자 단종이 즉위했다고 한다.

다시 말해 이선제 선생은 이 시기에 다음 임금이 되는 세자의 섭정을 보좌하거나 가르치는 스승 역할을 한 것이다.

각종 역사 기록에 등장한 그의 스토리는 흥미롭다.

광주 대촌에서 태어난 그는 본관은 광산이고 호는 필문인 조선 초기 문신이다. 포은 정몽주를 섬긴 양촌 권근. 매헌 권우에게 공부를 배웠고 1411년(태종 11년)에 진사시에 합격했고, 1419년(세종 1년) 문과에 급제한 뒤 1453년(단종 1년)까지 30년 이상을 관직에 있었다.

세종이 학술과 정책을 자문하는 씽크탱크였던 집현전을 만들자 사관, 수찬, 교리, 직제학으로 집현전에서 20년 가까이 일했으며 특히 ‘태종실록’이나 ‘고려사’, ‘고려사절요’ 개찬에 참여하면서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는 이실직서(以實直書)의 원칙을 강력히 주장하고 세종임금이 그대로 받아들이니, 이는 역사학자로서 올곧고 뛰어난 면모를 보여주는 예라 할 것이다.

강원도 관찰사, 예문관 제학, 동지춘추관사, 세자부빈객 등을 역임한 그는 주어진 관직에만 머물지 않고, 옛 제도를 고찰하고 잘못된 점도 개선했다.

소금을 국가수입원으로 삼아 국가재정을 확보해야 한다는 ‘이재소’, 국가 방어책을 위한 ‘군재소’ 등 경제, 국방, 의료, 국조(國祖) 선양 단군신전소 등 국정의 대소사에 자신의 견해를 올려 임금의 정책수립을 보좌했다.

이선제 선생의 일화중 가장 유명한 것은 조선 최초로 광주목(光州牧)이 무진군(茂珍郡)으로 읍호강등(邑號降等)된 광주가 다시 본 이름을 되찾고 목(牧)으로 환원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다는 것이다.

읍호강등은 모반이나 친족살해와 같은 강상죄가 일어난 고을에 대해 집단적인 징벌의 하나로 고을의 이름을 바꾸거나 고을의 지위를 낮추는 것을 말한다.

세종 재위 11년째인 1429년 광주 사람으로 만호 벼슬을 역임한 노흥준이 목사 신보안을 구타한 사건이 일어났다.

신보안이 그의 첩과 정을 통하다가 들키자 노흥준이 홧김에 관아로 들어가 신보안을 폭행한 것이다. 그리고 신보안은 얼마 뒤에 시름시름 앓다가 숨을 거뒀다. 처음엔 노흥준에게 매를 맞아 죽었을 것이란 소문이 파다했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설사병이 나서 목숨을 잃은 것으로 밝혀졌다.

이듬해인 1430년 조정은 세종의 수령권 강화정책(‘부민고소금지법’)을 최초로 어긴 이 일로 광주목을 무진군으로 강등시켰다. 또 중앙과 지방 사이를 연결하는 중간 행정기구로서 도의 지시를 군현에 전달하고 관할하는 계수관 역할도 장흥도호부에 내줬다.

재경(在京) 관료가 출신지의 유향소를 관장·통제하며 지방 업무가 중앙에 원활히 전달되도록 하는 ‘중앙 연락기구’인 경재소 광주지역 담당요원이었던 그는 재경관료들과 광주의 부로들(고을의 어른들)과 함께 복호상소를 올려 문종 원년(1451년)에 광주목으로 회복시켰다.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24호 괘고정수


때마침 광주에서는 새로운 누각(공북루)을 짓는 공사가 한창이었는데 복호 기념으로 누의 명칭을 희경루(喜慶樓)로 변경했다.

희경이란 광주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고 서로 축하했다(咸喜相慶)’는 말에서 따온 것이었다. 당시 신숙주는 ‘동방에서 제일가는 루(樓)’라 칭했다. 이후 누각은 고을원님의 연회장소로, 활터 등으로 쓰였다.

무진군으로 강등 이후 이선제 선생은 하루빨리 복호시키고 다시는 광주에서 이런 불상사가 없어야 한다는 공론을 세우고 ‘광주향약’을 창안하고 실행했다. 특히 광주 선비들을 향약을 토대로 결속시키고 창학(倡學)해 16세기 이후 호남사림 성장의 주춧돌을 놓았다.

거의 전 생애를 중앙에서 관료로 지냈지만 마음만은 고향인 광주에 있었던 것이다.



광주 희경루 전경


광주시는 20여년을 치밀하게 준비해 광주목 복호를 이룬 업적과 지역의 지배층이 아닌 백성의 입장에서 향촌 질서를 세우고 향약보급에 전념한 그의 공로를 기려 1988년 12월 필문로를 제정했다.

이는 필문 이선제를 기리기 위한 거리명인데 남광주 사거리에서 조선대학교 정문을 지나 서방 사거리까지 8차선 대로를 ‘필문대로’라고 명명했다.



필문 이선제 부조묘


광주 남구 원산동 만산마을 입구에는 수령 600여년의 늙은 왕버들이 자리하고 있는데 북을 걸어놓은 나무라 해 ‘괘고정수(掛鼓亭樹)’라 불린다. 정(亭)은 멈춰 쉬는 정자를 이르는데 나무를 정이라 했다. 이선제가 심은 것으로 자손의 흥망성쇠를 함께 하리라 예언했다고 한다.

정약용의 ‘동남소사(東南小事)’에 따르면 세간에서 광산이씨 가문을 일컬어 고려 후기 이순백부터 10대에 걸쳐 연속으로 홍패(紅牌·문과 급제 증서)를 받은 ‘십대등과(十代登科)’가문으로 홍패를 연결하면 병풍이 될 것이라고까지 했다.

광산이씨는 십대등과(十代登科), 12 홍문(弘文), 5 현(賢)을 배출했기에 괘고정수에서 가문의 광영을 알리는 북소리가 대대로 울렸다고 전해진다. 그러다가 1589년 기축사화로 가문이 멸문지화를 당하자 왕버들이 고사했는데 1624년(인조 2년) 이발·이길 형제가 역적의 죄명을 벗고 복권되자 다시 살아났다고 알려진다. 1998년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24호로 지정됐다.

2018년 ‘괘고정수축제’는 필문공묘지(지석) ‘분청사기 상감 경태5년명 이선제 묘지’(보물 제1993호)의 환국과 보물 지정을 기념하고, 역대 인물들의 과거 급제 때 부조묘에 고하고 괘고정수에 북을 걸고 축하연을 베풀었던 도문연(문희연)을 재현하는 두 가지 의미를 결합해 축제로 명명했다.



농악대를 앞세운 과거급제자 행진


부조묘란 본래 4대가 넘는 조상의 신주는 가묘(家廟)에서 꺼내 묻어야 하지만 나라에 공훈이 있는 사람의 신위는 나라의 허락으로 불천위(不遷位)가 된다. 불천위를 모시는 별묘를 부조묘라고 하는데 필문선생의 부조묘(광주광역시민속문화재 제7호)는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크기로 전퇴에 마루를 둔 겹처마 맞배집이다.

광주남구문화원이 광주 남구청의 후원을 받아 2005년 4월 2일 괘고정도문연재현행사를 재현한 바 있다.

광산이씨의 세계(世系)는 중시조 순백(珣白), 숙백(淑白), 승백(升白) 3형제가 각각 상서공파, 한림공파, 제학공파 파조가 돼 세계를 이어가고 있는데, 주로 호남과 영남 등에 있고 승백의 후손들은 주로 개성쪽에 세거하고 있다고 한다.

‘빛고을 광산을 보면 광주가 보인다’에서는 순백, 숙백, 승백이라고 기록돼 있다. 순백의 후손 상서공파는 전북 익산, 광주, 전남 능주, 순천, 강진, 화순, 진도 등 일대에서 살다가 기축사화로 멸문의 화를 입었다. 숙백의 후손 한림공파는 광주, 장성, 대구에 살면서 서로 따로 족보를 해오다가 1857년(철종 7년 병진년)에 이르러 세 형제간 합보가 이뤄졌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광산현 인물 중 고려 때 인물로 17명의 이름이 나오는데, 그중에 밀직부사 이홍길(李弘吉, 退隱 1324~1406)이 상서공 이순백의 손자이다. 조선조 인물 14명 중에 이홍길의 손자 이형원(李亨元, 1440~1479)이 있다.

후대의 기록인 광주읍지류에는 판도부사 이순(順), 대사성 이초(椒) 등이 나오는데 이 두 사람은 한림공파이다. 이발(李潑, 1544~1589)이 동인(東人)의 당수(黨首)로 화를 당하기 전까지 광산이씨들은 조선 초기 호남의 명문이었다. 광주 남구 이장동. 대촌동 원산마을은 광산이씨 집성촌이자 종가가 있었다. 광산이씨는 임진왜란 등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마다 나라를 지키는데 앞장서왔다. 임란 시 귀선 좌돌격장(함장)이 광산이씨 순천파 이기남 장군이다.

화순에서도 광산이씨의 영향력은 상당했다.

‘화순광산이씨승지공비’(전라남도유형문화재 335호)는 이달선의 묘갈로 화순읍 앵남리 앵남역 부근에 있다. 승지 호산 이공충은 현 일곡파의 직계 선조가 된다. 묘갈과 묘비는 본래 묘소 앞에 세우는 비석으로 본래는 구분됐으나 후대에 와서 서로 통용된다. 이달선은 광산이씨 시조 이순백의 6대손으로 승정원 부승지를 지냈다. 고려사를 감장하고 태종실록의 편찬에도 참여하고 예문관 제학을 지낸 이선제의 손자로 귤정 윤구의 딸 해남윤씨를 부인으로 맞은 전라감사 이중호의 조부이다. 부친인 이형원은 부제학이 돼 일본통신정사를 지냈는데 이달선은 그의 둘째 아들이다. 23세에 부친을 여윈 후 30세에 문과에 급제해 벼슬에 나갔다. 그의 둘째 아들 공충이 선조 7년(1576)에 비를 세웠다. 이 비는 비머리에는 별다른 조각이나 장식이 없고 위가 넓고 아래로 갈수록 좁은 상광하협의 호패형이다. 비문은 해남인 귤정 윤구가, 뒷면 음기는 율곡 이이가 지었다. 글씨는 나중에 영의정을 지낸 이산해가 썼는데 조맹부체로 자획이 선명하고 호활한 서체를 그대로 볼 수 있다.

필문 이선제 선생의 역사는 현재 재조명을 받고 있다.

2018년 9월부터 12월까지 국립광주박물관에서 ‘필문 이선제 묘지 20년 만의 광주 귀향’이란 주제로 전시전이 열렸다.

전시전은 보물 제1993호 ‘분청사기 상감 경태5년명 이선제묘지’를 일반인들에게 소개함으로서 기증문화 확산을 유도하고 호남의 중요 인물 관련 문화재로 활용도를 높이기 위해 마련됐다.

이 보물은 조선시대 집현전 학사 출신으로 종2품 관직을 역임한 이선제의 묘지로, 1998년 6월 김포공항을 거쳐 일본으로 밀반출됐다가 2017년 8월 일본인 소장가의 기증으로 국내로 환수된 문화재다.



이인곤 광산이씨 도문중 종회장은 “이선제 선생은 세종 1년 문과에 급제한 후 사관, 집현전학사로 재직하면서 태종실록, 고려사, 고려사절요 편찬 등에 참여했고 호조참판과 예문관 제학을 지내고 단종이 어린 세자 시절 그의 교육을 담당한 스승이었다”고 말했다. 최기남 기자 bluesky@gwangnam.co.kr


종친회도 이선제 선생을 업적을 기리기 위해 다양한 사업을 기획·추진하고 있다.

(사)필문이선제기념사업회는 필문학술대회와 괘고정수전통축제, 필문유적지 순회답사, 필문 이선제의 생애와 학문 도서발간, 출판기념회, 필문회보 발간 등 필문 이선제 선생을 기리고 그 정신을 이어받아 후학을 양성하고 교육하는데 힘써왔다.

이와 함께 (사)필문이선제기념사업회와 광산이씨도문중회는 지난 2024년 8월 광주 남광주역 일원에서 필문대로 안내 표지석 제막식을 진행했다.

2024년 11월에는 광주의 복호와 광주향약, 필문가의 가통과 전승 ,사림과 훈구의 갈등기 그리고 괘고정수의 애환 등을 다룬.‘필문학술총서 Ⅰ’를 펴냈다.

여기에는 필문 이선제 선생의 상서문, 신숙주 희경루기, 광주목 복호기사 등이 있다.

기념사업회는 오는 10월 24일 광주 남구 희경루 일원에서 제1회 희경루와 이선제 역사문화제를 개최한다.

이번 행사는 이선제와 희경루의 역사적 의미를 재조명하기 위해 마련됐으며 개막식, 주제극, 폐막식 순으로 진행된다.

주제극에서는 이선제 선생이 광주목 복호 교지를 임금에게 전달받는 당시 상황과 희경루 건립을 극으로 풀어낼 예정이다.

이인곤 종회장은 “이선제 선생은 단종의 스승으로 무진군으로 강등된 광주를 광주목으로 복호시키는데 주도적 역할을 하고 향약을 설행(設行)해 풍속을 순화하고 인재를 키운 광주를 빛낸 대표적 역사적 인물이다”며 “그의 정신을 지역사회에 알리기 위해 다양한 사업을 추진하겠다”고 강조했다.
송태영 기자 sty1235@gwangnam.co.kr         송태영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이 기사는 광남일보 홈페이지(www.gwangnam.co.kr)에서 프린트 되었습니다.

URL : http://www.www.gwangnam.co.kr/article.php?aid=1781515936539844023
프린트 시간 : 2026년 06월 15일 21:28: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