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사라진 '필름앤비디오·시네마펀드'의 빈자리

정채경 문화특집부 차장 대우

정채경 기자 view2018@gwangnam.co.kr
2026년 08월 05일(수) 18:52
정채경 문화특집부 차장 대우
레드카펫을 밟으며 어둑한 전시장에 들어서면 강렬한 흑백의 무빙 이미지와 날카롭게 번지는 사운드가 눈과 귀를 사로잡는다. 아시아를 대표하는 여성 실험영화 작가이자 한국 최초 여성 실험영화 집단 카이두 클럽의 리더인 한옥희 감독의 필름, 5·18민주화운동 40주기 기념작 ‘둥글고 둥글게’ 등 다채로운 실험영화를 만날 수 있는 ACC 필름앤비디오 ‘아시아의 장치들’전(~9.27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문화창조원 복합전시 2관)에서다.

ACC 개관 10주년을 맞아 마련된 이번 전시는 그동안 ACC가 연구하고 수집해온 아시아 실험영화와 비디오아트 일부를 한 공간에 다시 호출했다.

전시가 인상적인 이유는 작품 자체의 힘만이 아니다. ACC가 한때 아시아 실험영화와 비디오아트를 수집하고 연구해왔던 흐름이 전시장 곳곳에서 되살아나기 때문이다. ACC 필름앤비디오 아카이브 사업은 상업적 유통망에서 쉽게 만나기 어려운 아시아 각국의 실험영화와 비디오아트 작품을 모으고, ACC 시네마테크로 확장하며 연구와 상영, 전시로 확장하는 중요한 기반이었다. 아시아 영상예술 창작을 지원한 시네마 펀드는 그중에서도 창작을 직접 발생시키는 핵심 축이었다. 2018년 첫 공모 당시 아시아 17개 지역에서 118편의 프로젝트가 접수됐고, 사전제작과 후반제작 지원을 통해 총 10편이 선정됐다. 실험영화와 다큐멘터리, 미디어아트, 애니메이션 등 비상업 영상예술의 가능성을 공공기관이 지원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당시 선정 작가들의 면면도 주목할 만했다. 한국의 변재규를 비롯해 스리랑카의 비묵티 자야순다라, 필리핀의 존 토레스, 태국의 타이기 삭피싯 등 아시아 실험영화와 독립영화의 주요 창작자들이 이름을 올렸다. 선정 작가들은 ACC의 필름제작 워크숍과 네트워킹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완성작은 ACC에서 월드 프리미어로 선보이는 구조였다. 제작 지원과 연구, 상영, 국제 교류가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됐던 셈이다.

이같은 점에서 ‘아시아의 장치들’은 과거 아카이브의 성과를 품고 있지만 정작 그 기반을 확장하던 사업들은 현재 이어지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씁쓸함을 남길 수 밖에 없다. 아시아의 실험적 영상예술을 수집하고, 새로운 작품의 제작을 지원하며, 이를 다시 관객에게 공개하던 순환 구조가 약해진 것은 분명 아쉬운 대목이다.

시장 논리 안에서 쉽게 설 자리를 얻기 어려운 비상업 영상예술을 들여다 보고, 그것이 다음 창작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조건을 만드는 일은 ACC의 정체성과도 맞닿아 있다. 이번 전시는 ACC가 어떤 가능성을 품고 있었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떤 역할을 다시 고민해야 하는지를 깨닫게 한다. 아시아의 다양한 목소리와 실험적 영상예술이 다시 ACC 안에서 수집되고, 제작되며, 상영될 수 있도록 필름앤비디오 아카이브와 시네마 펀드가 지녔던 가치를 다시 들여다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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