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이 무대와 함께 호흡하는 공연을 만들고 싶죠"

[남도예술인] 정일행 극단 쟁이 대표
‘연기 매료’ 배우에서 연출·기획까지 무대 인생 20년
인간미 더한 역사 인물창작극…AI 활용 현장성 강조
"매번 달라지는 연극…관객들이 공연장 찾아오기를"

정채경 기자 view2018@gwangnam.co.kr
2026년 08월 18일(화) 07:03
정일행 극단 쟁이 대표는 “현장성 있는 공연을 많이 봐주셨으면 한다. 그래야 사람끼리의 정이 지속되고, 예술가들은 계속 관객 앞에 설 수 있다. 공연장은 배우와 관객이 함께 숨 쉬는 곳인 만큼 그 호흡을 더 많은 분들이 느껴주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뮤지컬 ‘소심당 조아라-묵묵히 피어난 민주주의의 꽃’ 공연 모습.
“감동은 순간일 수 있지만, 관객이 ‘동했다’는 건 무대와 함께 호흡했다는 뜻이라고 생각해요. 공연이 끝난 뒤 ‘재밌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왔으면 좋겠어요.”

정일행 극단 쟁이 대표는 자신이 바라는 공연을 이렇게 설명했다. 배우와 관객이 따로 떨어져 있는 무대가 아니라, 같은 시간과 공간 안에서 함께 웃고 반응하고 여운을 나누는 공연. 그가 25여 년 넘게 지역 연극 현장에 머무르며 배우이자 연출가, 기획자로 활동해온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정 대표가 처음 배우를 떠올린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학창 시절 그는 학생회장과 응원단장을 도맡고, 장기자랑이 있으면 늘 앞에 서는 학생이었다. 노래 부르고 춤추는 일을 좋아해 진로를 고민하던 시기, 서울 대학로에서 뮤지컬 ‘사랑은 비를 타고’를 보고 마음을 굳혔다.

“공연을 딱 보고 ‘나는 죽을 때까지 저걸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그때는 막연했지만, 결국 지금까지 공연을 하고 있으니 그 순간이 제 삶의 방향을 정한 셈이죠.”

호남대 연극영화과에 진학한 그는 배우가 되기 위한 가장 자연스러운 길로 연극을 택했다. 요즘처럼 뮤지컬 시장이 본격적으로 활성화되기 전이고, 연기에 관한 장르가 세분화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직접 포스터를 붙인 뒤, 조명과 음향을 조절하고, 무대 제작까지 단원들이 함께하던 아날로그 연극 현장이 그의 출발점이었다.

대학교 4학년이던 2003년, 광주에서 공연할 기회를 얻으며 푸른연극마을에 들어갔다. 첫 작품은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 이후 13년 동안 그는 배우로 무대에 서는 동시에, 공연 제작 전반을 체득했다.

극단 쟁이는 2017년 무렵 우연한 계기로 만들어졌다. 광주 산동교 6·25 전적지 기념행사를 총감독하며 공연과 행사를 함께 구성했는데, 사업을 수행하려면 단체와 사업자가 필요했다. 그렇게 시작한 극단은 행사 이후 입소문을 타며 의뢰가 이어졌고, 점차 지역 역사와 인물을 무대화하는 프로젝트형 극단으로 성장했다. 극단 쟁이는 남원과 강진 등 지역을 오가며 황희 정승, 정약용 등 역사 인물과 시대적 사건을 무대 위에 구현해왔다. 정 대표가 인물을 다루는 방식은 조금 다르다. 업적이나 기록만을 앞세우기보다, 관객이 그 인물을 ‘사람’으로 먼저 느끼게 하는 데 집중한다.

“정약용을 다룬다고 해서 학자라는 면만 보여주면 관객과 멀어질 수 있어요. 저는 그 사람의 인간미를 건드리고 싶었죠. ‘저 사람이 정말 저랬을 수도 있겠구나’ 하고 입체적으로 보이면, 관객이 나중에 더 깊은 이야기도 찾아보게 됩니다.”

그는 고전을 무겁고 딱딱하게만 다루지 않는다. 춘향과 몽룡이 만나는 장면에 현대적 음악을 접목하고, 역사 인물의 억울함을 랩으로 풀어내기도 한다. 세종대왕과 황희 정승이 무대 위에서 토론을 벌이는 식의 상상력도 더한다. 문헌 속에 남은 이야기의 뼈대는 지키되, 오늘의 관객이 웃으며 이해하고 반응할 수 있는 방식으로 다시 꺼내는 것이다.

정 대표는 “관객들은 굉장히 똑똑하다”고 말했다. 영화와 드라마, 온라인 콘텐츠를 통해 이미 높은 수준의 서사와 영상 문법에 익숙한 관객 앞에서 공연이 살아남으려면 더 치밀하고 더 생생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는 “재미있다”는 말을 가장 어려운 평가이자 가장 듣고 싶은 반응으로 꼽는다.

“배우가 잘한다는 말은 들을 수 있어요. 그런데 공연이 끝났을 때 그냥 ‘재밌다’는 말이 나오려면 많은 박자가 맞아야 합니다. 보고 나서 밥을 먹거나 술을 마시면서도 계속 회자될 수 있는 공연, 그런 공연을 만들고 싶어요.”

정 대표의 무대는 장르의 경계도 자주 넘나든다. 연극을 중심에 두되 마당극, 뮤지컬, 퓨전국악, 역사극의 요소를 작품 성격에 맞게 끌어온다. 푸른연극마을 시절과 이후 프리랜서 활동을 거치며 국악팀과 협업한 경험도 큰 자산이 됐다. 타악과 기악, 한국무용, 창극적 요소를 극 안에 접목하면서 극단 쟁이만의 색깔을 만들어왔다.

뮤지컬 ‘소심당 조아라-묵묵히 피어난 민주주의의 꽃’ 출연진들.
AI 융복합 역사음악극 ‘검은 눈물 갑향골의 35년’.
최근에는 인공지능(AI)을 공연 제작에 활용하고 있다. 지난 6월에는 광주 서암대로와 설죽로라는 이름으로 남은 양진여·양상기 의병장 부자의 실화를 바탕으로, 어머니 박순덕여사의 삶을 조명한 AI 융복합 역사음악극 ‘검은 눈물-갑향골의 35년’에서, 7월에는 소심당 조아라 선생의 정신을 계승·선양하기 위해 선보인 뮤지컬 ‘소심당 조아라-묵묵히 피어난 민주주의의 꽃’에서 각각 활용했다.

음악과 영상 제작 과정에서 AI 프로그램을 활용해 이미지를 만들고 아이디어를 확장하는 식이다. 다만 그는 AI를 완성된 답으로 보지 않는다. AI가 만든 결과물을 작곡가와 창작진이 다시 다듬고, 공연의 맥락 안에 맞게 재구성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시대에 발맞춰가야 한다는 생각이 있어요. AI를 써보니 편리한 것도 많고, 시선이 넓어지는 부분도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무대에서 관객과 만나는 건 사람입니다. AI는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도구죠.”

그는 새로운 기술을 두려워하기보다 직접 해보고 판단하는 편이다. 의상 역시 전통 한복의 형태를 유지하면서도 현대적 색감과 감각을 섞는 방식을 즐긴다. 남들이 쉽게 흉내 내지 못하는 장면을 만들고, 관객에게 “기발하다”는 반응을 끌어내는 것이 극단 쟁이의 경쟁력이라고 믿는다.

정 대표가 끝까지 놓지 않는 것은 현장성이다. 그는 AI를 활용하면서도, 그래서 더 공연장에 와야 한다고 말한다. 영화는 언제 보아도 같은 장면이지만, 연극은 매일 다르다. 배우의 컨디션, 관객의 연령과 반응, 그날의 공기까지 모두 공연을 바꾼다.

“저는 마당극을 제일 좋아합니다. 관객과 가장 현장성 있게 만나는 예술이기 때문이에요. AI와 대화하고, 혼자 콘텐츠를 보는 시대가 됐지만 공연만큼은 직접 와서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배우의 숨소리, 그날의 반응, 예상하지 못한 순간들이 있으니까요.”

정 대표에게 공연은 직업이면서도 삶의 방식이다. 배우, 연출, 기획, 극작을 오가지만 스스로를 하나의 역할에만 가두지는 않는다. 그는 “마지막까지 무대에 있고 싶다”고 했다. 꼭 배우로만 남겠다는 뜻도, 연출가로만 남겠다는 뜻도 아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공연을 만들고, 사람들과 만나고, 무대 위에서 호흡하고 싶다는 바람이다.

올해 극단 쟁이는 정극과 뮤지컬을 중심으로 활동 폭을 넓히고 있다. 남도 기억윽 걷다 무대화 프로젝트를 통해 지역의 인물을 새롭게 무대화 해왔고, 오는 9월에는 ‘여수세계섬박람회’ 기간 중 퓨전마당극 형식의 ‘백도유람기: 옥황상제 아들 체포작전’를 선보일 예정이다. 옥황상제의 아들이 하늘 일을 피해 여수로 내려오고, 용왕의 딸을 만나며 여수의 맛과 멋을 경험한다는 유쾌한 설정이다. 10월에는 강진 도공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뮤지컬 연출이 예정돼 있고, 내년에는 서빛마루문화예술회관 등 지역 공연장 상주단체 지원도 검토하고 있다. 지역 이야기와 인물을 무대화해 온 극단 쟁이의 작업을 더 안정적으로 이어가기 위한 구상이다.

정 대표는 지역 공연계가 오래 지속되기 위해서는 결국 관객의 발걸음이 필요하다고 했다. 기술은 발전하고 창작 방식은 달라지지만, 공연의 가장 중요한 힘은 사람이 사람 앞에 서는 순간에서 나온다는 믿음 때문이다.

“현장성 있는 공연을 많이 봐주셨으면 합니다. 그래야 사람끼리의 정이 지속되고, 예술가들은 계속 관객 앞에 설 수 있죠. 공연장은 배우와 관객이 함께 숨 쉬는 곳인 만큼, 그 호흡을 더 많은 분들이 느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정채경 기자 view2018@gwangnam.co.kr         정채경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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