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송전탑·핵발전소 없이 만드는 ‘광주 반도체클러스터’

김종필 광주지속가능발전협의회 위원·광주환경운동연합 사무처장

김종필 gn@gwangnam.co.kr
2026년 08월 26일(수) 17:31
김종필 광주지속가능발전협의회 위원·광주환경운동연합 사무처장
빛이 강할수록 그림자도 짙어진다. 정부가 발표한 호남권 3대 메가프로젝트와 광주 반도체 클러스터는 오랜 침체를 겪어온 지역에 오랜만의 기대를 안겨줬다. 800조원 규모의 투자, 첨단산업 유치, 양질의 일자리, 지역경제 활성화. 누구나 기다려왔던 미래의 모습일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개발의 화려한 조명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그 빛이 만들어내는 그림자도 함께 살펴야 한다. 지속 가능한 미래는 기대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그 미래를 떠받칠 물과 전기, 그리고 그것을 공급하기 위해 누가 어떤 부담을 감당해야 하는지까지 함께 물어야 한다.

반도체 팹 4기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하루 65만t의 용수와 6.3GW의 전력이 필요하다. 광주시민 전체가 하루 동안 사용하는 물과 전기를 뛰어넘는 규모다. 반도체 산업의 경제적 가치가 아무리 크더라도, 이 막대한 자원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 없이 성공을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더 큰 문제는 발전소보다 송전망이다. 정부는 신안 해상풍력과 영광 한빛핵발전소, LNG 발전 등을 통해 필요한 전력을 공급하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전기를 광주까지 보내기 위해 필요한 초고압 송전선로와 변전소에 대해서는 좀처럼 이야기하지 않는다. 전기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송전선로는 그렇지 않다. 신안과 영광, 충남에서 생산된 전기는 영암과 나주, 함평, 장성, 담양을 지나 광주에 도착한다. 그 길 위에는 거대한 철탑이 세워지고, 주민들은 건강권과 환경권, 재산권의 부담을 떠안게 된다. 우리는 오랫동안 수도권의 번영을 위해 지방이 희생되는 중앙집중형 전력체계를 비판해 왔다. 그렇다면 이제 광주의 성장을 위해 같은 희생을 또 다른 지역에 요구하는 것이 과연 정의로운 일일까.

최근 거론되는 영광 한빛핵발전소 부지 내 신규 핵발전소 건설도 같은 질문 앞에 선다. 광주시민이 자신의 생활권 한가운데 핵발전소를 세우는 일에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면, 다른 지역 주민에게 그 위험을 감수하라고 요구할 수도 없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위험이라면, 누구에게도 강요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에너지 정의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이 딜레마를 해결할 다른 길이 이미 우리 앞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다. 많은 사람들은 반도체 산업이 들어서면 더 많은 발전소와 더 많은 송전선로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전력 전문가들의 분석은 다른 방향을 가리킨다. 호남에는 이미 약 6GW 규모의 태양광과 풍력 설비가 구축돼 있다. 문제는 전기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수도권으로 보내는 송전망이 포화 상태여서 재생에너지의 출력이 반복적으로 제한되고 있다는 점이다. 전기가 없는 것이 아니라 보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해법은 의외로 가까이에 있다. 수도권으로 보내지 못하는 재생에너지를 광주 반도체 클러스터가 직접 사용하는 ‘지산지소’ 체계를 구축하면 장거리 송전 자체가 크게 줄어든다. 평상시에는 태양광과 풍력을 우선 활용하고, 기상이 악화될 때만 여수·광양 지역의 기존 가스발전소를 백업 전원으로 활용하면 연간 기준 RE100도 충분히 달성할 수 있다.

기술적 기반 역시 이미 마련돼 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산업단지 인근에 에너지저장장치(ESS)를 구축해 남는 전력을 저장하고, 동기조상기와 STATCOM 같은 전압 조절 설비, 그리드 포밍(Grid-forming) 인버터를 활용하면 재생에너지 중심의 전력망에서도 안정적인 전력 품질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한다. 여기에 기존 핵발전소의 조속기와 AGC(자동발전제어)를 개선해 출력을 보다 유연하게 운영한다면, 새로운 발전소를 짓거나 장거리 송전망을 확대하지 않고도 안정적인 RE100 반도체 산업단지를 구축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결국 부족한 것은 기술이 아니라 선택이다. 익숙한 방식처럼 발전소를 더 짓고 송전선로를 더 놓을 것인가. 아니면 이미 존재하는 재생에너지와 전력 인프라를 가장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새로운 길을 선택할 것인가.

광주 반도체 클러스터는 단순히 하나의 산업단지가 돼서는 안 된다. 대한민국 에너지 시스템이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첫 번째 사례가 돼야 한다. 지역에서 생산한 재생에너지를 지역에서 소비하고, 불필요한 송전망을 줄이며, 누구의 희생도 강요하지 않는 산업 모델.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대한민국에 제시할 수 있는 가장 미래지향적인 경쟁력이다.

빛은 멀리서 끌어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서 있는 곳에서 만들어질 때 가장 오래 간다. 광주가 선택해야 할 미래도 마찬가지다. 더 많은 송전선로와 더 많은 발전소가 아니라, 사람과 지역, 기술이 함께 지속가능해지는 RE100의 길. 그 길이야말로 광주 반도체 산업을 가장 오래, 가장 단단하게 빛나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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