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전충효’ 호패…월미도 이권 넘긴 민씨 세도의 민낯

심정섭 명예관장, 조선말기 문신 ‘민영주 호패’ 최초 공개
아들 민경식은 정권 전복 음모 가담…부자 나란히 유배형

임영진 기자 looks@gwangnam.co.kr
2026년 08월 27일(목) 18:36
민족문제연구소 지도위원이자 식민지역사박물관 명예관장인 심정섭 씨가 27일 조선 후기와 대한제국기에 제작된 호패 5점을 공개했다. 최기남 기자 bluesky@gwangnam.co.kr
조선 말 월미도의 이권을 일본인에게 넘기고, 사건이 드러나자 정권을 뒤엎으려는 음모까지 꾸며 유배형에 처해졌음에도 ‘집안 대대로 충성과 효도를 이어간다’는 의미가 담긴 ‘가전충효(家傳忠孝)’를 새겨 넣은 민영주의 호패가 최초로 공개됐다.

민족문제연구소 지도위원이자 식민지역사박물관 명예관장인 심정섭 사백(83·광주 북구)은 27일 조선 후기와 대한제국기에 제작된 호패 5점을 공개했다.

호패는 조선시대 16세 이상의 남성이 신분을 확인하기 위해 지니던 패다. 앞면에는 거주지와 이름, 출생연도 등을 적고 뒷면에는 관아의 낙인을 찍었다. 일반적으로 나무를 사용했지만 고위 관료나 과거 급제자 등은 무소뿔과 같은 귀한 재료로 호패를 제작하기도 했다.

심 명예관장이 공개한 호패에는 전남 보성의 선비 심규지·심의형, 광양의 선비 안창범, 광양 출신으로 추정되는 한량 이호종 등의 신분과 행적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포함됐다. 이중 심의형은 1909년 의병장 안규홍에게 군자금을 조달한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돼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반면 이들과 궤를 달리하는 것은 조선 말 문신 민영주(1846~?)의 호패다.

가로 5㎝, 세로 13㎝로 일반 호패보다 큰 이 호패는 1900년께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앞면에는 ‘판서 민영주’라는 이름과 관직, 출생년을 나타내는 간지 ‘병오’, 거주지인 ‘한성’이 적혀 있다.

뒷면에는 관아의 낙인과 함께 ‘가전충효’라는 네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는 당시 양반과 관료 사회에서 가문의 명예와 충절을 상징하는 표현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호패의 주인인 민영주의 행적은 이 같은 문구와 상당한 거리를 보인다.

민영주는 1887년 정시 문과에 급제한 뒤 내부 참의를 거쳐 판서까지 오른 고위 관료였다. 그는 1899년 비서원승 송접섭 등과 함께 정부로부터 월미도 개척권을 인가받은 뒤 이를 일본인 요시카와 다로에게 3만9000원(당시 대한제국 세입예산 400만원대)에 넘겼다.

정부로부터 받은 개척권을 일본인에게 매각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민영주는 결국 구속됐고 유배형을 받았다가 이후 해배됐다.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민영주의 아들 민경식 역시 문과에 급제해 궁내부 협판까지 오른 고위 관료였지만 아버지의 사건을 둘러싸고 정권 전복 음모에 가담했다.

민경식은 아버지에게까지 화가 미칠 것을 우려해 평리원 재판장 김영준과 사건 해결 방안을 논의했다. 이 과정에서 고종을 러시아공사관으로 옮기고 민영환·민병석·심상훈 등을 제거해 정권을 장악하면 민영주의 사건도 무마할 수 있다는 취지의 모의가 진행됐다.

민경식은 이에 동의하고 군부협판 주석면·김필규 등과 함께 모의에 가담했다.

그러나 음모는 내부 고발로 드러났다. 김영준이 민경식과의 이해관계 등을 이유로 월미도 사건의 전모를 고발하면서 민영주가 투옥됐고, 민경식 역시 김영준과의 음모 사실을 고발했다. 결국 김영준은 사형에 처해졌고 민경식과 주석면 등은 유배형을 받았다.

아버지는 국가로부터 얻은 월미도 개척권을 일본인에게 넘겼고, 아들은 아버지의 사건을 덮기 위해 정권을 뒤엎는 음모에 가담했다가 처벌받은 것이다. 그런데도 민영주의 호패 뒷면에는 ‘가전충효’가 선명하게 남아 있다.

심정섭 명예관장은 “국가의 이권을 둘러싸고 벌어진 추악한 거래와 권력 장악을 위한 음모 뒤에 ‘충효’를 내세운 민씨 세도의 이중적인 민낯이 드러났다”면서 “가문의 명분과 실제 권력층의 행태 사이에 놓인 간극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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