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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대학교 무용과 설립과 광주 시립발레단 창단 등 '광주 발레' 역사의 산증인, 무용인 박금자 선생이 60년 발레 인생에 대한 소회를 밝히고 있다, 최기남 기자 bluesky@ |
그가 걷는 걸음 걸음이 곧 광주 발레의 역사가 됐다. 처음이어서 힘겨웠던 길, 이제 발 길 멈추고 돌아다보니 발 딛은 곳 마다 열매 영글고, 활짝 꽃 피어 향기롭다.
지난 6일 '2015 젊은 무용가 초청공연' 행사에 '박금자상' 시상 차 광주를 찾은 원로 무용인 박금자 선생을 동구 충장로 한 카페에서 만났다.
60년 발레 인생을 풀어놓던 박금자 선생은 몇 번이고 그 시절의 자신과 대면했다. 지역 최초로 광주시립발레단 창단했을 때를 떠올리며 다시 한 번 영광스러움을 만끽했고, 광주문화예술회관 대극장에 올린 첫 작품 '백조의 호수'를 되뇌며 소녀 같은 웃음을 짓기도 했다.
△광주 발레 역사를 쓰다
"1952년 초등학교 때부터 춤을 추기 시작해서 지금까지 왔어요. 지역에선 처음으로 조선대학교 무용과를 만들었고 광주시립무용단을 창단했어요. 무용수들이 마음껏 춤출 수 있도록, 서울이 아닌 광주를 무대로 예술적 감수성을 터트릴 수 있도록 기반을 닦는 데 주력했죠."
박금자 선생의 업적을 들여다보면 '최초'라는 수식어가 많다. 지역 대학으로는 최초로 무용과를 만들었다. 1970년 당시 서울에서도 이화여대와 세종대 두 군데 무용과가 있던 시절이었다. 조선대학교 체육과 내 전공분야로만 있던 무용을 체육대학 내 무용과로 분리시킨 게 바로 이듬해인 1971년이다.
조선대 무용과 교수로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그에게 또 다른 과제가 하나 주어졌다. 졸업 후 무용수들이 춤 출 곳을 마련하는 일이다.
"실력 있는 무용수들을 광주에 다 잡아놓았는데 4년 대학 과정 후에 책임질 수 있는 곳이 없더라고요. 졸업 후 서울로 떠나버리면 무용과를 만든 의미가 없어지는 거죠. 그래서 전문적인 발레 활동을 할 수 있는 '시립발레단'의 필요성을 느꼈어요."
그 길로 그녀는 당시 전석홍 시장을 찾아갔다. 그는 전 시장에게 '도로 하나 덜 놓더라도 시립발레단이 있어야한다'고 설득했다. 1976년 지역 최초로 광주시립무용단(현 시립발레단)이 생겨났다. 지금도 지역에 시립발레단이 있는 곳은 광주가 유일하다.
예향의 도시 광주가 '무향'의 도시로 비상할 채비를 마친 역사적 해였다.
△ 광주 발레 위해 온 몸으로 뛰다
시스템이 갖춰졌지만 여전히 갈 길은 멀었다. 춤 출 인재들은 모아놨으나 이들이 맘껏 뛰놀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지 않은 것이다. 당시 공연장은 남도예술회관, 광주학생회관 등 600석 규모의 소극장 무대가 전부였다. 대작을 올리기엔 턱 없이 좁은 곳이다.
"대작을 하고 싶어도 공간이 나오지 않아서 못했어요. 대작들을 소극장 공연에 맞춰 공연하고 간이 무대를 만들고 공연이 끝나면 뜯고 이를 반복했죠. 그러다가 '광주발레' 제대로 가려면 대극장 하나 있어야 한다고 지어주라고 요청했어요. 그래서 만들어진 게 지금 광주문화예술회관 대극장이에요."
문예회관 대극장이 지어질 때 사람들은 '박금자 선생 집 짓는다'고 말했다. 그는 매일 같이 공사장을 쫓아다녔다. 극장이 제 모양새를 갖춰갈 때 마다 저 무대에 무슨 작품을 올릴 지, 가슴이 뛰었다고 전했다.
지방 최초 무용과 설립과 시립무용단 창단, 문예회관 대극장 무대까지, 뚝딱 뚝딱 진행된 일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그는 이를 위해 광주에 '발레'를 알리는 데 주력했다.
"당시 시의 공식적인 행사가 있으면 식전 행사로 꼭 발레공연을 올렸습니다. 이른 아침 행사라면 무용수 분장, 의상 채비 등 공연을 위해 새벽밥 먹고 준비했어요. 공무원들이 발레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만 그에 따른 '지원'도 있을 것이라 생각했거든요."
행정과 온몸으로 부딪힌 소통의 결과는 광주가 발레의 메카로 발돋움하게 했다. 실력 있는 무용수들과 공연장이 갖춰지자 국제발레페스티벌, 콩쿠르 등이 잇따라 광주에서 열렸다.
△예향 광주는 '무향'의 도시
박금자 그가 광주시립발레단 단장으로 활동한 세월만 20년이다. 그 시간 동안 그는 '무향'의 도시로서 광주의 가능성을 내다봤다. 광주의 춤꾼들은 타고난 예술적 끼가 남다르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는 이들을 자산으로 발레에 '한국적 감성'을 더 했다.
최초로 만든 한국 창작 발레 '심청', '춘향'이 그것들이다. 발레에 한국 레퍼토리를 입힌다고 하니 '그게 될까?'하는 우려의 목소리가 더 컸다. 과학적이고 절도 있는 서양 발레와는 달리 한국의 노래와 춤사위는 절제미가 주가 되는 내적인 춤이기 때문이다.
"어려운 작업임에도 불구하고 창작발레에 목을 맨 이유는 해외 도시와의 문화교류를 위해서였어요. 당시 시립무용단 창단 공연으로 '백조의 호수'를 선보였지만 이를 해외로 가지고 나갈 순 없거든요. 광주 발레만의 브랜드 작품 '주 무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죠."
지금에야 퓨전이니, 융합이니 하는 공연이 신선하진 않지만 당시 동서양 예술의 접목은 신선 그 자체였다.
그의 예술적 감수성은 올해 7월 U대회 개폐회식 공연에서 빛을 발했다. 후배들에게 기회를 주고 싶어 몇 번이나 고사했지만 '무향광주'를 전 세계에 내보이고 싶은 욕심에 다시 현장에 섰다.
한국의 '한량' 문화를 엿보이는 전통 춤사위부터 현대무용과 발레 등 한국 춤의 역사를 총망라하는 공연으로 선보였다. 그는 광주에서 수많은 일을 했지만 입 모아 칭찬 받은 일은 U대회 무대가 유일했다고 웃음 지었다.
누구보다 광주 발레를 사랑하는 그이지만 요즘 지역 무용계를 보면 아쉬움도 많다.
"광주시립발레단은 지역의 한 예술단체로만 머물러 있어선 안 됩니다. 지역 유일의 시립발레단으로서 국립발레단과 실력을 겨뤄야죠. 그만큼 후배들이 필드에서 의욕적으로 잘해줘야 하고요. 후배들을 이끄는 지도자들도 화합해야 합니다. '광주발레'의 발전을 위해 하나가 돼야죠."
△'박금자상'에 60년 발레 인생 담다
박금자 선생이 광주에 남긴 것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하지만 그가 가장 영광으로 꼽는 것은 매해 광주를 빛낸 무용인들에게 수여하는 '박금자상'이다. 올해로 벌써 8회째를 맞았다. 광주를 떠나 상경하면서 무엇인가를 남기고 싶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무향의 도시 광주라는 타이틀을 쥐고 가는 데 그 주역은 이제 후배들이에요. 이 후배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만든 것이 '박금자상'입니다. 예술이란 게 최소한의 동기부여가 가장 중요하더라고요. 지속가능한 광주무용의 발전을 위해서 작지만 큰 의미를 담아 시작하게 됐죠."
올해 박금자상의 영광은 김옥희 전 광주예술고등학교교사가 차지했다. 무용계 후배들을 키우는 데 그 역할을 다 해준 것에 대한 고마움을 담았다.
발레에 대한 그의 애정은 서울에서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박금자 선생은 서울 강남구에 위치한 성암아트센터 이사장으로 재직하며 무용기획공연과 안무자 양성교육, '천원의 행복한 발레여행'등을 꾸려가고 있다. 지난해에는 아트홀 10주년을 기념해 작품 영상 상영, 갤러리 등을 마련해 전시도 진행했다.
60년 발레를 위해 뛰었으나 그의 꿈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발레학교'를 짓는 일이 남은것. 발레 연구소와 연습장, 무용 전용 극장과 발레 아카데미 등을 갖춘 발레학교를 짓는 게 꿈이다.
"러시아국립극장예술대(GITIS)에는 '발레학교'가 있어요. 실제 성암아트센터 개관 당시 기치스 예술대학의 분교로 '발레학교'로 만들고 싶었지만 실현하진 못했죠. 제가 꿈꾸는 '발레학교'는 원로와 현역 무용수들 이둘 모두가 꿈을 펼치는 발레의 장이에요. 전국 곳곳에서 무용계를 빛내며 뛰고 있는 원로들, 광주의 후배들 모두 그때 함께 만났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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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26 (수) 14: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