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용산 오리 길에/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사이로/ 회오리바람 타고/ 간다는 말 한 마디 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 채/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 부용산 봉우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가 바로 그것이다.
시 부용산이 만들어져 노래가 되기까지는 세 사람의 인연과 세 여인의 죽음이 있었다. 운명적인 만남을 하게 된 사람들이 박기동, 조희관, 안성현이며, 폐결핵으로 요절한 여인들이 박기동의 여동생 박영애(24), 항도여중 학생 김정희(18), 안성현의 여동생 안순자(15)였다.
박기동은 1917년 여수 돌섬에서 한의사인 아버지 박준태의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초등학교 4학년 때 벌교로 이사했다. 일본의 명문 간사이대학 영문학과를 졸업한 박기동은 귀국하여 벌교초등학교 교사 등을 거쳐 순천사범학교에 재직하던 중 결혼한 여동생이 미처 자식을 낳지도 못한 채 병을 얻어 죽자, 해발 100m도 채 안 되는 벌교의 부용산 자락에 묻고 내려와 슬픔에 잠겨 시를 지었는데 그것이 ‘부용산’이다.
조희관은 1905년 영광에서 출생하였으며, 수필가이며 교육자로서 한글사랑과 국어순화운동 및 문예지 발간사업에 힘썼다. 1947년부터 1950년까지 목포 항도여중 교장으로 부임하고 있으면서 천재문학소녀 김정희를 위하여 지도교사로 박기동을 영입한 인물이다.
또한 조희관은 항도여중을 명문학교로 만들기 위해 각별한 노력을 하고 있었으며, 이 때 이미 음악교사로 평판이 높던 도쿄음악학교 출신의 안성현을 데리고 있었다.
안성현은 1920년 나주 남평 출신으로 큰 키에 미남이었고 동경 유학시절 무용가 최승희와 친분을 맺고 있었다 하며, 김소월의 시 ‘엄마야 누나야’의 작곡가이기도 하다. 철저한 낭만주의자였던 안성현은 가족을 광주에 두고 목포 조희관 교장 댁에서 기거했다. 6·25 전쟁이 일어나기 전인 1949년 9월 돌연 안성현은 항도여중을 그만두고 월북하고 만다. 이에 대해 여러 설이 있지만 잠시 남한에 온 최승희를 따라 북으로 갔다고 보는 설이 유력하다.
박기동은 항도여중 국어교사로 부임하면서 급속도로 안성현과 친분관계가 이루어졌다. 그는 당시 중학교에서는 최초로 ‘새싹’이라는 문예지를 발간하는 한편, 안성현과 함께 목포극장을 빌려 ‘항도여중예술제’를 열었다. 시 낭송은 박기동이, 음악부문은 안성현이 각각 맡아 지도했다. 그러던 중 1948년 10월 김정희 학생이 죽고 만다.
김정희는 해방직전 경성사범학교에 입학했다가 몸이 쇠약해지자 고향인 목포로 내려와 항도여중으로 전학했다. 늘 수석을 차지할 정도로 수재였으며, ‘감화원설계’로 전국백일장대회에서 장원을 수상하기도 했다. 감화원설계는 아동학대로 악명 높던 목포 고하도의 감화원을 소재로 한 글이었다. 김정희가 죽자 학교는 충격에 빠졌다.
그리고 어느 날 안성현은 우연히 박기동의 습작노트에서 시 부용산을 발견하게 되고 곧바로 작곡에 들어갔다. 어린 여동생을 잃어 가슴앓이를 하고 있던 안성현은 제자 김정희마저 떠나자 주체할 수 없는 슬픔에 빠져 복받치는 감정으로 단번에 부용산에 곡을 달았다. 노래 부용산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절절한 곡조 덕분에 노래 부용산은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어 사방팔방으로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1948년 당시는 남한만의 총선거로 이승만 정부가 탄생하였지만 사회는 날로 흉흉하기만 했다. 급기야 제주 4·3 사태에 이어 여순사건이 발발하게 되고 지리산 등으로 들어간 빨치산들은 한 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불안한 생활 속에서 떠나온 고향마을과 두고 온 가족들을 생각하며 애절한 마음으로 노래 부용산을 불렀다. 월북한 안성현이 작곡한 부용산은 어느새 빨치산의 노래가 되어 있었고 그 시를 쓴 박기동은 순천사범 때 잠시 ‘남조선교육자협회’에 가입했던 사실이 추가되면서 용공분자로 몰려 갖은 고초를 겪어야 했다.
이 후에도 박기동은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야 했다. 1982년 부인(문행자)마저 죽고 1993년 그는 단신으로 홀연히 호주로 이민을 간다. 1998년 연극인 김성옥이 호주로 그를 찾아가 노래 부용산의 2절 가사를 부탁하자 그 자리에서 박기동은 ‘그리움 강이 되어 내 가슴 맴돌아 흐르고…’로 시작되는 2절을 작시하고는 한참을 펑펑 울었다고 한다. 2003년 영구귀국을 하였으나 그 이듬해인 2004년 한 많은 삶을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