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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옥씨는 “절제되고 잘 다듬어진 중용의 멋이 가야금의 매력”이라며 “가슴을 울리는 연주로 세상과 소통하는 연주자로 살고 싶다”고 말했다. |
정선옥씨(전남도립국악단 가야금 수석)는 태어나서 가장 잘한 일이 가야금을 시작한 것이라 꼽는데 망설임이 없다. 어린 아이들이 유독 애정을 보이는 ‘애착인형’처럼 가야금은 그의 전공악기이자, 심신의 안정을 찾아주는 일종의 ‘애착악기’와 다름 아니다. 늘 그의 곁엔 가야금이 자리하고 있다.
열한 살 때, 방과 후 활동시간에 접한 가야금은 그를 홀딱 반하게 했다. 집으로 돌아가서 “가야금 배우고 싶어요” 입을 떼자마자, 어머니는 “그래 하거라” 단번에 허락을 해줬다. 그의 예술적 재능을 내다 봤다기보다는, 오래해봤자 한 달이겠거니 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노래도 하고 춤도 추고, 다분한 끼를 기반으로 뮤지컬까지 맛을 봤던 그였다. 그만큼 다방면에서 흥미를 보였지만 그것이 오래가지는 못했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가야금만큼은 달랐다. 가족들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고, 정씨는 가야금에 꽂혔다. 중학교 2학년 때 그는 강제적으로 가야금을 빼앗기기도 했다. 공부도 곧잘 했던 그였기에 어머니가 반대하고 나선 것. 반 년 정도 가야금 근처에도 못가다가 “가야금 없이 못 살아요” 정씨의 투쟁이 시작되자 투항을 한 건 어머니 쪽이었다. 그렇게 가야금을 쥔 세월이 벌써 40여년이 돼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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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씨가 대통령상의 영예를 차지한 ‘땅끝해남전국국악경연대회’ 경연. |
전남대 예술대학 국악학과에서 공부한 그는 과에서 ‘연습벌레’로 유명했다. 친구들이 차 마시러 가자고 하면, “연습이 한 시간 반 정도 남았거든? 먼저 가 있어. 금방 갈게”라는 앞뒤가 안 맞는 대답을 내놓곤 했다.
얼만큼이나 지독하게 연습을 했느냐고 묻는다면, 명절 때 이야기를 안할 수가 없다. 온 가족이 다 모이는 명절날이면 그는 살짝 도망을 나와 학교로 향했다. 수위 아저씨 몫의 명절음식까지 싸들고서였다. 가족들이 북적이는 통에 연습할 짬이 안나니, 연휴 날까지 학교로 나와 연습을 했던 것이다. 수위 아저씨는 “학생, 집이 없냐?”고 묻곤 했다.
정씨는 “대학 시절엔 하루에 10시간 이상 연습을 했었다. 정말로 열정적으로 연주했던 때”라면서 “하루도 빠짐없이 가야금을 연주했는데, 가야금이 무엇인지 스스로 답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악기를 통해 무엇인가를 찾고자 했던 시절이었다”고 들려줬다.
졸업과 동시에 그는 전남도립국악단에 입단, 올해로 꼬박 26년을 근무했다. 30대 때는 안정적인 직장에서 연주활동을 이으며, ‘안분자족’한 삶을 살았다고 전해준다. “이 정도면 괜찮다”는 만족감이 있었던 터다. 슬럼프는 40대 중후반에 찾아왔다. 결혼과 출산·육아를 병행하면서 그 또한 ‘워킹맘’들이 겪는 아픔들을 겪었다. 아이들을 케어 하느라 연습할 시간은 자꾸 우선순위에서 밀려났고, 스스로 생각해도 부족한 연습량은 늘 그 자신을 다그쳤다.
그는 “이즈음 내가 알고 있던 가야금이 전부가 아님을 알게 됐다. 가야금의 겉면만 훑고 있다는 조바심이 들었다”며 “가야금을 마주하고서, 혼자만의 외로운 싸움을 이어갔다”고 말했다.
그 중 2010년 ‘영광법성포전국국악경연대회 명인부 종합대상’(국무총리상) 수상은 그에게 “잘하고 있다”는 위로와 용기를 준 상이었다.
정씨는 사실 대회 날 아침까지도 ‘갈까 말까’를 고민했다. 하지만 이때가 아니면 못하겠다 싶어서 짐을 싸서 대회장으로 향했다. 결과에 집착하지 말자고 마음을 다잡고선 결선 연주를 마쳤다. 당시 심사를 맡은 고 백대웅 국악작곡가(한국예술종합학교 명예교수)는 “나 여기 내려오길 참 잘했다. 이렇게 좋은 가야금 소리를 참 오랜만에 듣는다”고 극찬했다.
이를 기점으로 그는 생활 패턴에 조금씩 변화를 줬다. 강의나 연주·제자 레슨 등 ‘일’들은 줄여가고 가야금과 마주 앉는 시간을 늘렸다. 두 딸아이들도 제법 컸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산조 연습에 공을 들였다. 그러자 이전엔 들리지 않았던 게 들리기 시작했다. 국악계에선 이를 ‘이면’을 발견했다고 하는데, 이면이란 쉽게 말해 그 속의 진정한 소리나 내용을 일컫는다.
그는 “이전에는 정해진 악보에 따라 성실히 연주하는 데 초점을 뒀다면, 이면을 발견한 후에는 ‘아, 선생님이 연주를 어떤 마음으로 하셨겠구나’처럼 마음의 깊이를 느낄 수 있었다”면서 “가야금을 시작한 이래 가장 행복하고 가치 있는 시간이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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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피렌체 ‘프랑코 제페렐리’ 박물관에서 펼친 연주 모습. |
그는 김죽파류 가야금산조를 따른다. 연주의 특징을 물었더니 “곰삭은 곰국 맛이다”고 맛깔나게 표현한다.
정씨는 “처음 들었을 때 귀에 확 들어오는 가락은 아니다. 하지만 두 번 들으면 ‘어? 이거 좋네?’ 느끼고, 세 번째 듣는데 ‘이거 뭐야?’ 했다. 들으면 들을수록 그 깊이가 느껴지는 것이다”면서 “기교나 짜임새가 도드라진다기보다는 산조 중에 가장 우아하고 고급스럽다”고 의견을 밝혔다.
이처럼 그가 생각하는 가야금의 매력은 절제에서 나오는 기품이다. 인생사 희로애락을 선율에 담아내는데, 넘치지도 또 모자라지도 않게 흘러나오는 선율이 그의 가슴을 울린다. 정씨는 “엉엉 소리 내어 우는 것 보다, 어떨 땐 꾹 참고 있는 목멤이 더 슬픈 것처럼, 가야금에는 절제되고 또 잘 다듬어진 중용의 미가 있다”고 꼽았다.
그는 올해 음반 발매를 목표로 하고 있다. 그간 숱한 독주회를 열었지만 음반으로 남겨놓지 않았던 걸 후회한다. 나잇대별로 달라지는 연주를 기록해놓지 못해서다. 정선옥만의 가야금 연주의 맛과 멋을 담은 음원들을 모아, 올해 음반으로 발매할 계획이다.
마지막으로 애정을 쏟고 있는 제자 양성 역시 주력할 뜻을 내비쳤다.
정씨는 “제자들이 내 보물이고 재산이더라”며 “첫 연을 맺은 큰 제자가 벌써 38살이 됐다. 가르침을 주는 제자였다가, 부지런히 따라 와 이제는 음악적 동반자로 함께 하고 있다”며 “제자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선생, 가슴을 울리는 연주로 세상과 소통하는 연주자로 살고 싶다”고 덧붙였다.
박세라 기자 sera0631@gwangnam.co.kr 박세라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