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서양화가 강동권씨는 “제 회화의 주체가 사랑이어서 앞으로 줄곧 장미꽃을 사랑의 관점에서 그려나갈 것”이라면서 “전시를 많이 여는 것보다는 작업 안에서의 활동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다”고 밝혔다. |
그의 작업실은 북동에 있다. 롯데백화점 광주점 대각선 건너편에 자리하고 있다. 5년전 들어온 지금의 작업실은 대로변 복잡하지 않은 곳에 자리한데다 햇볕마저 잘 들어와 그는 만족하고 있다는 전언이다.
그는 엄밀하게 말하자면 2세 화가다. 그의 부친은 광주살레시오고 미술교사로 퇴임한 서양화가 강대성 선생이다.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틈틈이 작업을 하는 아버지의 그림을 어깨 너머로 보면서 미술을 익혔다. 그가 자연스럽게 화가의 꿈을 꿀 수 있었던 배경이다. 부친은 그가 미술교사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로 아들의 미술을 허락했다고 한다. 그런데 부친의 바람과는 다르게 그는 작업 욕심을 내게 되면서 교육자의 길보다는 작가의 길을 가게 됐다.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일체의 고민없이 미술대학을 목표로 학업과 창작에 매진했다. 어느 날은 미술학원에 갔다가 충격을 받는다. 스스로 미술을 잘한다고 생각했으나 자신보다 출중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서 놀랐다는 것이다. 이는 마음을 다잡고 학업에 더욱 고삐를 죄게 된 계기가 됐다.
![]() |
‘사랑의 향기’ |
그의 회화의 분수령은 35세 때 갈린다. 이때 결혼을 하게 되고, 결혼은 그에게 작업의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촉매제가 된다. 결혼 이전에는 자유로운 작업을 펼쳤다. 가령 욕심에 찬 작업을 꼽을 수 있다. 이름을 알리고 싶은 마음이 앞섰다. 실제 작업은 설치 등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을 정도로 그는 도전과 변화를 거부하지 않았다. 결혼 후에는 이런 변화와 도전이 자양분이 돼 자신감을 더할 수 있었고, 자신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장미’ 작업으로 귀결할 수 있었다. 이처럼 장미 작업으로 귀결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작업을 견인할 힘을 갖게 되면서 장미 작업은 한층 더 탄력을 받을 수 있었다.
“젊은 시절 장미를 위시로 한 꽃 그림 때문에 오해를 샀어요. 그림팔이 쉽게 하려고 꽃 그림을 그린다고 함부로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죠. 젊은 시절에는 실험적인 분위기에 따라 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장미 직전의 작업을 살펴보면 그가 얼마만큼 젊은 날 실험을 중시했는가를 직감할 수 있다. 1999년 작업했던 ‘1500권의 책’이라는 작품은 그의 대표적 실험작품으로 평가를 받고 있다. 그 전에는 인물화를 했고, 비구상을 종횡무진 누볐다. 변화의 과정으로, 이것 저것 가리지 않았다. ‘1500권의 책’은 당시 새로운 발상이 투영된 작품이다. 이 작품을 하던 무렵 작가는 생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생활고에 시달리면서 녹록지 않은 창작의 길을 체험한 셈이다. 창작자도 생활을 해야 했기에 대안학교에 3년 동안 강의를 나갔으며, 조선대에 10년, 삼성전자에 3년, 그리고 광주대와 순천대 등에 다년간 강의를 출강, 생활인으로서 최선을 다했다. 가장이었기 때문이다.
어디 드러내놓고 요란하게 작업을 하는 성격이 아니다. 이는 부친의 성품을 그대로 물려받은 셈이다. 그러면서 창작을 핑계되지 않고 가정에 충실했다. 그는 예술보다는 가정을 먼저 생각했다. 가정이 흔들리면 작업실에 나와서도 자신이 생각한 예술을 이끌어낼 수 없다는 것을 잘 인지하고 있어서다.
그래도 그에게는 하고 싶은 작업이 우선이었다. 지금은 희귀해져 볼 수 없는 일명 이브생로랑 성냥갑 1000개를 구해 책장을 제작해 책을 구현했다. 현재의 장미만을 바라봤다면 잘 연결이 안되는 것은 사실이다.
![]() |
‘사랑의 빛-꿈’ |
“겉으로 보여지는 성공보다는 내면을 더 채워 넣는 것에 집중하자는 생각을 했어요. 이때 꽃 작업으로 넘어왔습니다. 복잡하고 머리아픈 삶이지만 ‘사랑’ 하나면 모든 것이 포용되잖아요. 이런 생각이 화가로서의 길을 갈 수 있겠구나 하는 확신으로 연결됐죠. 저는 살아가면서, 작업하면서 사랑이 제일 중요하다고 봅니다.”
오늘날 사람을 대체한다는 인공지능(AI)이 등장했지만 심장이 없는 만큼 사랑을 대체해낼 수 없다는 신념을 토로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편안한 가정을 통해 그 에너지로 작업에 집중할 수 있을 것이라는 무게를 두고 창작을 전개했다. 그의 회화들의 색채가 밝은 톤이 많은 데는 ‘그림이라도 밝아야 삶이 밝아진다’는 지론 때문이었다.
이런 배경을 이해하고 나면 그가 왜 장미작업을 펼치는지 십분 이해할 수 있다. 일단 꽃 중에서 대표명사가 장미이고, 꽃말이 사랑이어서 장미에 집중한다. 그리고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도 ‘사랑’의 길이어서다. 그의 장미는 그냥 그려지는 장미로 보면 큰 오산이다. 그가 추구했던 유형에 대한 이해가 전제돼야 제대로 된 이해를 할 수 있다.
“과거의 장미 작업은 덩어리 중심으로 했죠. 하지만 저는 섬세하게 작업하는데 치중했어요. 수채화적인 작업이라고 보면 정확할 거예요. 유화 재료를 쓰면서 수채화 느낌의 작업을 한 게 다른 분들과의 차이예요. 과거 유화 작품들은 끊어지고 갈라지는데 제 그림은 얇게 물감을 올리는 방식으로 해서 수채화처럼 그리기 때문에 100년이 흘러도 갈라질 우려는 하지 않아도 됩니다.”
최근에 그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배경을 풀어서 장미 그림을 그리고 있고, 색채 변화를 주고 있다는 설명이다. 장미는 그의 회화 중심을 관통하는 소재다. 그래서 장미 작업은 그로부터 떼어내 설명할 수는 없다. 마지막으로 그와의 인터뷰에서 작업을 하는 한 변화하지 않을 내용으로, 전시에만 연연하지 않은 채 어떠한 과정으로 작업에 충실하며 이끌어 나갈 것인가로 보였다.
“제 회화의 주체가 사랑이어서 앞으로 줄곧 장미꽃을 사랑의 관점에서 그려나갈 것입니다. 전시를 많이 하는 것보다는 작업 안에서의 활동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에요. 작업을 하다 보면 수학문제처럼 계속 풀어야할 것들이 생겨나더군요. 그것을 풀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을 해나가야죠.”
고선주 기자 rainidea@gwangnam.co.kr 고선주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