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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강수씨는 “음악만을 바라보고 살아온 인생이다. 한 번 만나고는 단 한 번도 샛길로 새지 않았다”며 “언제 어디서나 팬들과 노래로 소통하면서 살아가고싶다”고 밝힌다. |
“너 목소리 참 좋다”는 친구의 말에 얼결에 마이크를 쥐었고, 스테이지에 올랐다. “미국 가서 노래할래?”라는 선배의 제안에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소중한 1집을 만들어 돌아왔다. 음악은 우연처럼 흘러서, 주인처럼 들어앉았다. 그렇게 노래한 세월이 30년이다. 이제 돌아다보니, 하나도 버릴 게 없었던 시간이다.
가수 박강수씨를 만나러 가는 길에 ‘바람이 분다’, ‘부족한 사랑’ 등 그의 노래를 들었다. 양 옆으로 가로수가 든든하고, 유독 맑은 날이라 더없이 어울리는 선곡이었다. 좁은 골목을 지나, 창평파출소 앞길에 다다르니, ‘소통’이라는 작은 간판이 눈에 띈다. 그가 담양 창평에 마련해 놓은 작업실 공간이다.
모락모락 김이 오르는 커피를 앞에 두고 마주 앉았다. ‘언제부터 노래를 했느냐’고 의심 없이 물었다. 숱한 예술가들처럼 어려서부터 감출 수 없던 소질 덕에 자연스럽게 마이크를 쥐었을 것이라 여긴 탓이었다. 그런데 의외의 답이 돌아온다. “노래할 생각이 전혀 없던, 가수가 된다는 걸 아주 몰랐던 삶”이었단다. 실제로 학창시절에 그가 장래희망 란에 쓴 것은 ‘선생님’이었다.
마이크를 쥔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갓 스무 살이 될 무렵, 수원에 터를 잡은 그는 주점이며 레스토랑, 호프집에서 서빙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 시절, 음식점 대부분엔 DJ 박스가 있기 마련이었다. 일하면서 자연스레 음악에 귀를 기울였다. 듣는 귀는 이때 이미 길러졌다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어느 날, 지역에서 활동하는 통기타 가수들을 만났다. 주거니 받거니, 돌아가면서 노래를 부르며 놀았는데, 그 중 한 명이 박씨의 음색을 칭찬했다. 그러다가 “알바 안 해 볼래?” 솔깃한 제안이 들어왔다. 30분 노래하면 20만원을 벌 수 있었다. 당시 아침에 출근해 저녁에 퇴근하는 사무실 경리의 월급이 30만원 정도였으니, 그에겐 거부할 이유가 없는 선택이었다. 그렇게 10년간의 언더그라운드 생활이 시작됐다.
‘생계형 가수’로 노래를 하며 살아가던 중, 박씨에게 기회가 생겼다. 여느 때처럼 무대를 마치고 내려왔는데, 한 선배가 “얘, 너 미국 안 갈래?” 했다. 그는 두 번 생각도 안하고 “네” 고개를 끄덕였다.
미사리 판에서 10여년 노래했던 박씨에게 권태가 왔을 때였다. 그는 “오래 활동하다 보니 판을 내주겠다는 사람도 여럿 있었지만 말 뿐이었고, 녹음까지 다 마치고서 엎어지기도 했다. 그런 낙심들이 이어지다 보니 내가 서 있는 이 바운더리에서 벗어나고픈 열망이 일었다”고 회고했다.
그렇게 6개월 간 미국 뉴욕에 있는 카페에서 노래를 했다. 처음에는 ‘내가 여길 왜 왔을까’ 후회를 했지만, 빠르게 적응했다. 그러다 포크 록의 거장으로 꼽히는 한대수씨와 연을 맺는 행운이 찾아왔다. ‘음반을 만들자’는 말에, 그는 노래하며 받은 팁과 한국에 남겨둔 차를 팔아 자금을 마련했다. 이미 곡들은 써놨던 터, 미국 연주자들과 합을 맞춰 음반 작업에 들어갔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부족한 사랑’이다.
1집 음반 중 ‘가겠소’에 얽힌 비화가 흥미롭다. 그가 음반 작업을 위해 ‘가겠소’의 가이드를 떠뒀는데, 미국인 제작자의 마음을 울렸다. 그는 박씨 목소리 위로 하모니카 선율을 입혀뒀다. 다음 날, 하모니카 반주가 곁들어진 ‘가겠소’를 들은 그는 그것 그대로 마음에 들어서 딱 한 번 부른 가이드 곡을 음반에 실었다. 아름다운 그의 목소리에서 비롯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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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이 끝나고 팬들과 함께. |
박씨는 “가수가 가진 것 중 오래 변치 않고, 고유의 것으로 드러낼 수 있는 게 바로 음성이다. 3옥타브 4옥타브까지 올라가는, 저보다 노래 잘하는 가수들은 참 많다. 하지만 박강수가 지금까지 무대에 설 수 있었던 이유는 내 목소리를 사랑해준 덕이다”고 말했다.
박씨는 그의 큰 음악적 자산을 창평에서 보낸 유년시절을 꼽는다. 그는 남원에서 태어났지만 10살 때부터 창평에서 자랐다. 고향을 창평이라고 말하는 데 망설임이 없는 이유다.
그 시절 흙길을 걷고, 염소, 토끼 밥을 주면서 컸다. 어느 도시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것들에 흠뻑 젖어 살았으니, 그가 내뱉는 감성 또한 남달랐다. 유난히 마음에 와 닿는 노랫말들은 그 기억의 힘 덕일 것이다. 8집 수록곡 ‘대나무처럼’만 봐도 알 수 있다. 집 뒤란에서 들려오던 댓잎들이 바스락 거리는 소리, 눈 쌓인 대나무를 흔들며 놀았던 시절, 계절을 견디고 자란 죽순의 생명력을 그는 노래에 담았다.
박씨는 “얼마 전 우연히 죽순을 보는데, 어렸을 때의 기억이 쫙 펼쳐졌다. 뿌리에 연 생명, 햇볕만 받으면 욕심도 없이 곧게 자라는 대나무를 보면서 ‘대나무처럼’을 썼다. 그때 기억이 없었다면 나오지 못했을 노래다. 시간은 지나온 것 같지만, 그저 흘려보낸 게 아니라 촘촘히 쌓여 바로 내 곁에 있었다”고 전했다.
그는 지금껏 150여곡을 내놓았다. 150곡이 나왔으니, 1500곡 이상을 썼다는 이야기다. 음악이 일상이었고, 삶의 기록이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객지 생활의 어려움과 외로움을 곡으로 써 세상과 소통했다. “이 이야기를 꺼내 볼까?”하는 마음이 들 때마다 한 곡씩 발표했고, 이를 알아봐주는 팬들과 깊게 교류하며 지냈다.
그러다 본격적으로 박강수만을 위한 ‘판’을 깐 것은 2006년이다. 마음은 있었지만 현실적인 여러 이유들로 미뤄왔던 일을, 그는 마다가스카르 여행에서 돌아온 후 곧장 실행에 옮겼다. 그곳에서 경비행기를 탔다가, 목숨에 위협을 느낄만한 상황이 벌어졌는데 그때 든 생각이 “아! 나의 무대”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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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박씨가 운영하는 공연장 ‘베짱이홀’은 코로나19로 잠시 문을 닫았지만, 1년에 세 네 번씩 ‘박강수 콘서트’를 열어왔다. 공연을 많이 하는 가수로 널리 알려진 것도 이 덕이다.
바깥 활동에 제약이 많은 요즘엔 유튜브 채널 ‘박강수 TV’로 팬들을 만나고 있다. 처음엔 그도 무대에 설 수 없는 현실이 너무나 답답했지만, 이제는 전화위복으로 삼으려 한다. 랜선 하나면 연결되는 무대가 열렸다 여기니, ‘더 큰 무대’를 가진 것 마냥 설레는 마음이다.
박씨는 음악을 곧 운명이라 말한다. 인생에 방향키로 두고, 부단히 따라왔다. 여생 또한 지난 삶과 다르지 않게 흘러갈 것이라 한다.
그는 “전혀 생각지 않았던 일을 30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운명이라는 말 뿐 더 이를 말이 무엇일까. 음악만을 바라보고 살아온 인생이다”면서 “한 번 만나고서는 단 한 번도 샛길로 새지 않았다. 지금처럼 언제 어디서나 팬들과 찐하게 소통하면서 살고 싶다”고 덧붙였다.
박세라 기자 sera0631@gwangnam.co.kr 박세라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