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의 사유 확장…갇혀있는 것들 뛰어 넘고 싶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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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예술인

"작품의 사유 확장…갇혀있는 것들 뛰어 넘고 싶죠"

[남도예술인 ] 서양화가 김유미
시대와 생각의 변화 추구… 추상표현주의·색면 추상 혼합
다양한 경험 살리며 텍스트와 결합된 ‘바다’ 이미지에 집중
올 9월 키아프 출품·뉴욕 이어 국내 개인전…저서 증보판도

사각의 화폭 안에 15개의 원형의 이미지가 무슨 의미일까. 이는 추상작품 ‘신비의 실체’ 시리즈를 보며 든 생각이다. 사각과 원형이라는 대별적 이미지가 이처럼 선명하게 다가왔던 데는 오랜 동안 학습효과로 인해 이미지와 단어가 눈과 머리에 구별돼 쉽게 다가왔을 뿐만 아니라 태어나면서 제일 먼저 접했던 이미지였기 때문이다. 그만큼 빨리 접해 고향처럼 친숙해서다. 하지만 그의 화폭 속 사각과 원형은 만만치 않다. 추상이어서 어렵다는 생각보다는 너무나 많은 의미들이 펼쳐져 있어서다.

캔버스 원단에 다채로운 색감으로 그림을 그린 뒤 이를 동그라미 형태로 잘라내는 것으로, 원형은 색이 사라지게 된다. 작가는 여기서 수많은 조형미를 유도한다. 그것이 사유의 출발이다. 잘려나간 원형 그림들은 하얀 천 위에 다시 배열돼 또 다른 작품으로 탄생한다. 한동안 이런 작업방식이 꽤 깊이있게 다가왔고, 잔상으로 남았다. 광주 출생 서양화가 김유미(필명 김이오·김25)씨의 작품 이야기다.

김 작가를 처음 만난 게 아마 3년여전 양림동에서 간담회를 했을 무렵이다. 그가 오래전에 광주에 머물며 작업을 하고는 있었음에도 필자와는 유독 연이 닿지 않아 심층적 이해의 기회를 갖지는 못했다.

그는 화면들을 비워놓는다. 여백이자 현대인들에게 삶의 근원적 가치이고 숙제인 비움과 채움의 메시지를 던진다. 적어도 최근 파도가 등장하는 추상으로 작업이 완전 변하기 전까지는 그렇다.

파도의 추상에 한창 천착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데는 최근 예술의거리 인근 그의 작업실을 방문해 자연스럽게 요즘의 작업을 접하면서다. 그의 작업실은 누가 봐도 영락없는 화가의 작업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완성된 작품과 완성을 향해 가는 작품이 벽을 따라 줄을 맞춰 세워져 있다. 벽에 기댄 작품들은 잠시나마 갤러리에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어린왕자를 기다리며’
평소 그가 제일 많이 머무르며 작업하는 작업 공간과 작은 규모의 또 다른 작업실 등 여러 공간으로 획정된 그의 공간 바닥은 온갖 색감들이 고의로 칠한 것인지, 작업 파편인지 모르나 그것 자체가 오히려 작품처럼 보였다.

김 작가로부터 안내를 받아 작업 공간을 둘러본 뒤 그의 삶과 회화인생 전반을 들을 수 있었다. 광주 한 복판인 충장로에서 성장한 그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당시 강연균 원로화가가 대표로 있던 로댕 미술학원을 다니며 화가로의 꿈을 키웠다. 그는 화실을 계속 바꿔가면서도 기초를 익히며 미술공부에 빠져들었다. 이런 노력으로 각종 미술대회에 출전해 다수 수상한 이력을 갖춰나가기 시작했다.

그가 화가의 꿈을 흔들리지 않고 키우게 된데는 홍익대 교수로 재직 중이던 친척 언니(한국화가)로부터 자문을 구해 미술학원을 선택, 전문적으로 미술공부를 한 덕이다. 중·고등학교에 진학해서는 미술부 활동을 계속 이어나갔다. 마치 미술인 외에는 다른 꿈을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것처럼 말이다. 오로지 미술만 바라봤던 것 같다.

그렇게 해서 미술을 꿈꾸는 사람이라면 갈망한다는 홍익대 서양화과에 진학한다. 대학에 가서는 잠시 미술외적 활동에 빠져들었다는 설명이다. 자신이 문학을 좋아해 시쓰는 선배들과 많이 어울리며 보냈다는 것이다. 대학 분위기가 자유로워 시도 쓰고, 교수들과도 자유롭게 교유했다고 한다. 이런 덕분에 글을 많이 썼던 것으로 보인다. 83학번인 그가 재학 무렵에 박서보 서승원 최명영 이두식 김태호 윤형근 교수 등 국내 미술계 내로라하는 분들이 교수로 포진해 있었다. 당시는 추상회화의 뿌리가 깊어 자신도 추상작업에 집중했다는 전언이다.

하지만 대학시절 자신만의 회화세계를 찾았다기보다는 여러 도전과 실험의 시기로 받아들인다. 아마 추상작업 이후 표현주의로 넘어갈 수 있었던 배경이 대학시절로 이해됐다. 첫 개인전에서 추상주의 작품이 아닌, 표현주의 계통의 그림들을 선보여서다. 이때만 해도 그는 자신의 작업세계를 찾았다기보다 모색하고, 탐색하던 시기로 읽혀졌다. 그 모색과 탐색의 축은 아마 시대적 변화와 생각의 변화로 읽힌다.

이렇게 미술가로 활발하게 활동을 벌여나가던 중 1999년 신구문화사에서 펴냈던 화집 형식의 첫번째 저서인 ‘내 안의 야생공원’이 교보문고에서 8주간 베스트에 오르기도 했다.

전시 카탈로그를 만들려고 하다가 에세이로 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후배에게 넌지시 내비쳤더니, 글과 그림을 보내라 해서 보내줬다. 그랬더니 처음에는 샘터에서 추진되다가 결국 신구문화사에서 나오게 됐다.

작가의 저서는 그런 류의 책이 거의 없었던 초기라고 보면 된다. 자신과는 무관하게 띠지에 새겨진 문구로 마음고생을 해야 했던 그는 글을 한동안 절필해야 했다. 다행스럽게 그는 그때 받은 상처들을 극복하고 그림 작업에 몰두해온 듯하다. 다행히 오는 9월 증보개정판 제안을 받았다고 귀띔했다. 증보개정판에는 새로운 글과 그림 및 신작들을 포함해 다채로운 꼭지들을 넣어 진행할까 고민 중이다.

‘행운을 연습하다’
글 솜씨가 뛰어난 그는 다양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그의 현실적 영역은 미술이었다. 화가로서의 ‘삶이 주’라는 의미다. 그는 일찍이 메이저로 올라갔다.

서울 청담동 PICI에서 개인전을 열면서 메이저 화랑에서의 전시가 이어졌다. 이때 금산갤러리 대표를 만난 것이 오늘날 그가 그곳의 소속작가가 된 출발점이 된 셈이다. 그렇게 해서 만난 지 20년 인연을 쌓고 있다. 오사카 시립미술관 초대전이나 현재 메이저 중 한 곳으로 평가받는 노화랑에서의 개인전 등이 성사돼 성황리에 마무리할 수 있었다.

미술과 문학을 넘나들던 그의 삶의 이력에는 대학에서의 18년 강의 및 학생과 프로젝트 공모전으로 했다가 인테리어 디자인 사업으로 확대돼 외연이 너무 커지면서 졸지에 사업가로도 이름을 올렸다. 그는 이때 회사 경영과 대학강의 및 창작으로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이렇게 바쁜 시간이 전개되다 보니 나중에는 2∼3년에 한차례 개인전을 열기도 버거워 졌어요. 그래서 회사 경영에서 물러나는 한편, 대학 강의도 정리하게 된 것이죠. 물론 그 뒤로 자잘한 일들은 했지만 지금으로부터 4년전부터는 모두 정리한 채 미술에만 집중해 왔습니다.”

이는 전업 화가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전업화가의 길을 가면서 해외의 사례를 들며 그 의미를 설명하기도 했다. 일본 도쿄 긴자 화랑거리 소재 마키앤 타무라 화랑에서 전시를 하면서 전업작가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됐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전업화가를 높이 쳐준다는 것이다. 일본은 명망있는 작가들마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작업을 하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일본은 12등급으로 화가를 나누는데, 1등급을 빼면 모두 일을 하고 밤에 작업을 하는 풍토가 있다고 전한다. 이런 전업화가가 갖는 의미가 현재, 그의 삶과 무관치 않아 한참 설명을 이어나간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사업이 성공해 욕심을 더 내도 되련만, 그는 과감하게 사업을 접었다. 그는 말한다. 사업 경험이 없었다면, 사업을 하지 않았다면 누군가에 손을 벌렸을텐데 자족하면서 작업을 할 수 있게 된 배경이라고. 자신이 가난했다고 치고, 그림만 그렸다면 얼마나 더 나아갔을까라는 물음을 스스로에 던지기도 했지만 이 모든 것들이 숙명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는 설명이다.
“이런 경험치가 지금의 자양분이 되고 있다는 점에 공감해요. 3차원 공간에 대한 것이 입체적 사고를 할 수 있게 했다고 봅니다. 이게 그림을 더욱 발전적으로 이끌었죠,”

1990년 첫 개인전부터 시작해 31년에 걸쳐 열일곱차례 개인전을 해오는 동안 그의 회화 세계는 네 차례의 변화를 거친다. 처음에는 1986년 성행한 신표현주의 작품에 몰두한데 이어 10년 정도 추상 색면에 천착한 뒤 이미지를 색으로 치환한 그림 미디어에 노즐을 넣어 색으로 만드는데 집중했으며, 추상표현주의에 안착하는 것으로 접근했다. 금산갤러리에서의 전시는 추상표현주의를 해체하고 조합하는 작업을 선보인 자리였다. 그는 현재 추상표현주의와 색면 추상이 혼합된 기법을 구사하고 있다.

여기서 하나 더 진일보하게 된 것은 문자 추상이다. 명심보감 등에서 차용한 문자와 리얼리즘의 혼합으로 이해하면 된다. 또 한 쪽으로는 ‘어린 왕자를 그리며’의 작업에 어린 왕자의 텍스트를 썼듯, 어떤 텍스트와 결합된 ‘바다’ 이미지에 집중하고 있다. 지금의 작품을 보면 앞서 언급한 ‘신비의 실체’가 이해가 안될 정도로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그는 장시간 인터뷰에 지친 기색없이 답을 이어 나가며, 앞으로의 계획과 어떤 평가를 받는 작가가 되고 싶은 지에 대해 밝히는 것으로 갈무리했다.

“올 9월 키아프를 대비해 감상자를 놀라게 할 만한 작품에 도전해보고픈 생각이 있어요. 그래서 집중하기 위해 싱가포르나 아트 부산 등 상반기 일정들을 모두 취소했죠. 개인적으로 지난해 뉴욕전이 예정돼 있었으나 코로나 때문에 연기돼 아쉬웠는데 올해는 열릴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구요. 금산갤러리에서의 개인전도 열 거예요. 좀 더 유연한 작가는 물론, 작품들의 표현에 대해 확장을 이뤄내는 동시에 즐기는 작가, 그리고 실험을 지속하는 작가가 됐으면 하죠. 작품의 사유를 확장시키며, 갇혀있는 것들을 뛰어 넘고 싶습니다.”
고선주 기자 rainidea@gwangnam.co.kr        고선주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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