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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6년 촛불혁명은 최순실의 국정농단과 최유라의 특혜 논란이 도화선이 돼 터졌다. 공정하고 정의로운 나라를 바라는 시민의 아우성이었고, 새 정부는 불공정을 해소하라는 국민의 명령을 받았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듬해 5월 취임사에서 이렇게 밝혔다.
그런데 4년이 지난 지금, 문재인 정부는 오히려 불공정의 도마 위에 올랐다.
집권 직후 인천공항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기점으로, 내로남불의 시비, 부동산 가격 급등, 조국 사태, LH 사태가 이어지면서 ‘공정’ 논란이 연발했다. 여기에 코로나19가 몰고 온 사회 각계의 불평등과 조국 사태, LH 사태에 반발한 민심은 이런 논란에 기름을 부었다.
조국 사태가 커지면서 윤석열 전 검찰총장은 공정의 수호신처럼 부상했고, 보수층 지지자들로부터 예비 대권 주자로의 기대감을 키웠다. 급기야 여성과 지역 할당 폐지를 부르짖으며 ‘공정한 경쟁’을 주장하는 ‘이준석 돌풍’까지 몰고 왔다.
돌이켜보면 박근혜 정부에서 최순실·정유라는 희대의 불공정 사태의 공동 책임자였다. 정유라 씨가 ‘돈도 실력이야. 너네 부모를 탓해’라는 취지로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국민을 분노하게 했다.
이제는 그 불공정을 치유하기 위해 등판한 문재인 정부에 대한 비판이 커지고 있다. 물론 코로나의 영향과 아마추어 같은 국정운영의 미숙함도 한몫을 했다고 본다. 그렇지만 집권여당의 입장에서 보면 선의로 편 정책들이 악의로 해석되고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으려 하지 않는 상황이다. 이걸 어찌 봐야 할까?
더불어민주당 한 중진 국회의원은 “마치 혁명 이후에 반혁명세력이 커지는 것 같다. 프랑스 혁명도 큰 혁명 이후에 수차례의 작은 반혁명과 혁명이 이어졌지 않았느냐”고 말했다.
공정한 경쟁을 강조하는 것은 전통적인 보수진영의 논리다. 반면 진보진영은 ‘효율’만 따지는 보수에 맞서, 경쟁에 참여하지도 못하는 소외자와 경쟁에서 낙오한 약자를 배려하는 ‘평등’을 주장한다. ‘효율’과 ‘평등’은 공정을 지키기 위해 보수·진보 양 진영이 주장하는 논리이다. ‘비례’와 ‘보편’의 원리라고 한다. 효율과 평등, 비례와 보편은 공정을 판단하는 중요한 잣대이지만, 서로 보완적이다.
‘21세기 자본’이라는 저서를 쓴 토마 피케티, 지난 2001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조지프 스티글리츠, 불평등을 정면으로 다뤄온 앤서니 앳킨슨 교수는 실증 자료와 이론적 근거를 바탕으로 이런 결론에 도달했다. 세계의 석학들이 입증했듯이 위험수위에 달한 자본주의를 구하려면 불평등을 완화해야 한다.
마이클 샌델이 ‘공정하다는 착각’에 대해 설파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우리가 공정이라고 믿는 것들이 얼마나 허구인가를 지적하고, 능력주의가 가져다주는 잘못된 신화에 대해 비판했다.
호남과 영남의 불균형에 대해 생각해보자. 국가가 경제성장을 위해 경부축을 개발하는 정책을 취했고, 영남은 수혜자가 됐다. 성장에서 밀려나고 소외된 호남에게 국가는 어떻게 배려해야 하나. 졸지에 거북이 신세가 된 호남에게 이제 공정한 경쟁을 보장할 테니 토끼가 된 영남과 겨뤄보라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우리 경제가 선진국 대열의 문턱에 오를 때까지는 불공정에 대해 잠시 접어두었지만, 이제 불공정을 혁파하지 않고서는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끊임없이 공정에 대해 고민하고 시정해야만 다시 도약할 길을 찾을 수 있다. 문재인 정부 4년의 진통이 그것을 웅변한다.
이제 4차산업혁명이 본궤도에 오르면서 일자리 양극화가 극심하면 극심할수록 불공정은 수만 개의 얼굴로 피어오를 것이다. 그럴 때마다 국민과 함께 공정에 대해 성찰하고 해결하지 않으면 우리 사회는 혼란의 수렁에 빠질 수 있다.
내년 3월 대한민국을 이끌 새 대통령이 될 사람이라면 ‘공정’이라는 화두에 대해 분명하고도 확고한 입장이 있어야 한다.
이성오 기자 solee235@gwangnam.co.kr 이성오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