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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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했지만

고선주 문화특집부장

[데스크칼럼] 우리들 삶은 점차 코로나19 이전과 이후로 나뉘는 듯하다. 코로나19 이전, 아무런 눈치보지 않고 떠났던 국내외 여행이든, 집앞 마실 나들이든 간에 지금은 함부로 결행할 수 없다. 인류의 삶이 바이러스에 공격을 당할 것이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그 공격 때문에 ‘지구촌이 하나’라던 공식이 이렇게 쉽게 무너져버릴 것이라고 누가 믿었을까.

코로나19의 기원에 앞서 대다수 선진국들이 무방비하게 바이러스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일관하던 것을 목도했다. 그동안 서구 열강의 민낯이 그대로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국내에서는 지난해 1월 첫 확진자가 나온 이후 롤러코스터를 타듯 감염병 사태가 지속되다가 4차 대유행을 맞아서는 1800명선 안팎의 확진자가 꾸준하게 속출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 확산세가 꺾일듯하면서도 꺾이지 않고 오히려 더 확산될 조짐마저 보이고 있다.

문제는 그동안 델타 변이니, 델타 플러스니 하는 변이 감염이 늘고 있는데다 그 감염 속도가 엄청나다는데 있다. 또 접종을 했음에도 감염되는, 돌파 감염까지 횡행하고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 지금은 휴가철이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고 해야 할 명제가 한없이 허무하게 다가오는 요즘이다. 가족 모임마저 8인에서 4인으로 줄었다. 그만큼 감염병 사태가 심각하다는 반증이다.

2년여 격리생활을 하다보니 누구나 그 피로도가 말 못할 정도다. 오랜 기간 방역수칙을 지키느라 마음 졸였던 일상 뒤로 이제 서서히 긴장됐던 마음까지 느슨해지려 한다. 코로나19를 겪으면서 사람들은 알았을 것이다. 여행이나 나들이가 이렇게 우리 삶에 소중한 장치라는 것을 실감하고 있을 터다.

코로나19가 종료되면 일순위가 여행일 것이다. 갇혀 산 자들의 ‘고통의 회포’라고나 할까. 과거에는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했지만, 현실은 복잡한 회로처럼 얽혀 있어 떠나지 못하는 직장인들이 넘쳐났다. 누가 붙잡고 한 것이 아닌데도 떠날 수가 없어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는 것은 내 이야기보나는 먼 나라 이야기처럼 다가오는 형국이 비일비재했다.

그런데 진짜 코로나19 덕분에 함부로 떠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으니, 이처럼 허무한 일이 또 있을까 싶다. 바다 건너기가 이렇게 두려운 적이 있었을까 생각해본다.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다녀왔다면 어쩔 도리 없겠지만.

근래 조금씩 마스크를 벗는 나라들 소식이 들려와 한없이 좋았다. 곧 있으면 우리도 마스크를 벗게 될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코로나19 이전으로 일상이 복원돼 해외 여행이 가능하겠지, 비행기 타고 바다 건너 갈 수 있겠지라는 희망 고문 말이다.

우리는 방역을 잘해 왔지만 마스크를 낀 일상은 답답하기 이를데 없다. 더욱이 온전하게 일상을 향유하기조차 어려워 ‘이게 사는 건지’ 하고, 스스로에게 묻곤 한다. 어쩌다 인간의 삶이 이렇게 됐을까 자책부터 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코로나19는 엄연한 현실이다. 지구촌 사람들이 많이 희생됐고, 인도 등 지금 이 순간에도 초비상인 나라들이 많다. 그러니 이런 사실을 자각하는 순간, 겸손해 할 수밖에 없다. 금방 떠나자 했다가도 주저앉는 이유다. 내년부터는 바다 건너 다른 나라들을 여행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지만, 그것마저 어려울듯 싶어 우울해진다. 한때 올 여름부터 코로나19 눈치를 안보고 떠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순진했던 것이다.

그런데 신기하다. 바이러스가 시간 그 자체는 감염시킬 수 없나 보다. 시간은 째깍 째깍 흘러간다. 온난화로 휴가철이 더 길어졌다. 휴가철이어서 괴롭지만, 또 휴가철이라는 시간은 흘러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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