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진 곳에 시선…"공동체에 투신한 삶이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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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예술인

외진 곳에 시선…"공동체에 투신한 삶이고자 했다"

예술인플러스(문화운동 앞장 임의진 목사)
해방신학 공부 후, 헌금·십일조 없앤 ‘냠녘교회’ 운영
亞전당 옆 허름한 건물 광주정신 담은 ‘메이홀’ 탈바꿈
문화 다양성 위해 ‘제3세계 음악’ 채집…10집 음반 계획

사진제공=리일천
생을 ‘한껏’ 살았다 한다. 그러면서 이제는 조금 살살 해도 되지 않겠느냐며 웃는다. 그는 아름다운 글과 그림을 내놓는 작가이자, 제3세계 음악을 발굴해 세상에 선보이는 월드뮤직 전문가다. 한 땐 목회자로서의 삶을 살았고, 문화공간을 이끄는 기획자의 길도 기꺼이 걸어왔다. 업이 수 개인 그이기에 “한껏 살았다” 해도 응당 그러하다고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낮은 곳에서, 배제된 것들에 시선을 주며 함께해 온 임의진 목사가 그 주인공이다.

해가 쨍하던 한 낮, 그가 관장으로 있는 ‘메이홀’에서 마주앉았다. 첫 질문으로 생각해 온,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물었다. 그가 행하고 있는 여러 일들을 발현시킨, 그 근원적 힘이 궁금해서다.

임 관장은 유년부터 20대까지는 채움의 시간이었다고 술회한다. 상자 안에 꽁꽁 숨어 있다 훅! 하고 튀어나오는 용수철 인형처럼, 그 시절 내내 그득그득 내면을 채웠다. 이후의 삶은 예상대로 폭발하는 탄성 에너지를 타고 마음껏 튀어 올랐다.

침잠해 살아온 유년시절은 사실 그에게 아픔이다. 온통 검정색 이라고도 말한다. 어린 그의 곁엔, 유난히 몸이 아팠던 형이 있었다. 남들보다 약한 존재였기에 그는 형을 지켰고, 또 그래야만 했다. 형의 나이 열여덟, 영영 이별하기 전까지 둘은 쌍둥이처럼 꼭 붙어 지냈다.

“삶이 시끄럽고자 했던 건 아닌데, 시끄러웠죠. 존재감 없이 조용하게 살았지만 세상은 우리를 그냥 두지 않았습니다. 남들의 도 넘은 말과 행동들이 삶을 들쑤셨고, 상처받지 않기 위해 애썼지만 아팠죠. 도려낼 수 있다면 그러고 싶은 시간입니다.”
예루살렘 언덕에서
‘삭제’하고 싶다지만, 그렇게 지낸 시간은 그의 삶에 단단한 지지대가 돼 준다. 남들과 어울리기 보단 목사이셨던 아버지 서재에서 박혀 지냈다. 그곳에서 온갖 책들을 접했고, 음악과 미술에 특화된 감수성도 이때 길러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엇보다 사회적 약자, 장애인, 외진 것들에 마음을 주는 삶의 ‘소명’은 운명처럼 그의 삶에 들어앉았다. 일찍이 가버린 형 대신 두 사람의 몫을 살아야겠다는 다짐은 지금껏 이어지고 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그 또한 목사가 됐다. 할아버지 때부터니까 3대가 목회자의 길을 걸은 것이다. 그는 신학교에서 해방신학을 공부했고 졸업 후, 10년간 고향 강진에서 ‘남녘교회’를 운영했다. 허나 이곳은 보통의 교회가 아니었다. ‘급진적인 교회’였다는 그의 설명이 부족하다 여겨질 정도다. 우선 그의 교회에는 십일조와 헌금이 없었다. 가난한 농민 신자들을 위함이었다. 대신 세금 내기 운동을 벌였다. 또 주의 은혜를 칭송하는 찬송가 자리엔, 이미자나 김추자의 사랑 노래가 차지했다. 그는 “찬송은 새들이나 하는 것, 삶을 담은 가요에 오히려 충분한 영성이 있다”고 봤다. 어떤 존재를 과도하게 찬송하는 것은 자신과 맞지 않는 일이었음을 그는 고백한다.
월드뮤직 채집을 위해 떠난 아이슬란드 레이카비크에서
돌연 목회자의 삶을 정리하고, 담양에 터를 둔 것은 2004년이다. 이곳을 베이스캠프이자 정거장 삼아 세상을 여행했다. 남미 음악에 깊이 빠져 멕시코, 쿠바, 아르헨티나 등을 다녔고, 노르웨이, 스칸다나비아를 둘러보며 월드뮤직들을 ‘채집’했다. 큰 사랑을 받은 음악 영화 ‘원스’의 주제곡, 뛰어난 음악성으로 주목을 끌었던 드라마 ‘안녕프란체스카’의 삽입곡들 모두 그가 처음 국내에 전한 노래들이다. 10집 발매를 앞두고 있는 스테디셀러 ‘여행자의 노래’를 비롯해 20여장의 선곡 음반을 내기도 했다. 왜 ‘월드뮤직’인가 가벼이 물었는데, “다양한 문화의 공존을 위해서”란 가볍지 않은 답이 돌아왔다.

“미국과 일본에서 파생된 음악 외에, 다른 문화들도 국내에 터를 두게 하고 싶었어요. 우리나라의 음악이 자생하기 위해서는 이곳저곳 다양한 문화가 힘겨루기를 하는 북적거림이 필요하다고 봤거든요. 제 일상엔 늘 음악이 플레이 됐고, 취미 삼아 또 일 삼아 몇 시간이고 음악을 들었습니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일하는 그를 두고 지인들은 ‘떠돌이’란 별명도 지어줬다. 금방이라도 훌쩍 떠나버릴 것만 같은 그를 보며 불안했던지, 친구들이 먼저 ‘메이홀’ 공간을 제안했다. 함께 모여 이야기도 나누고, 놀 사랑방 하나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임씨는 이왕 만드는 김에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곁을 콕 점찍었다. 그중에서도 일부러 더 허름하고 버려진 공간을 골라잡았다. 처음에 이곳은 쥐가 나와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곳이었다.
정영창 화백 전시 오프닝에 함께한 임의진 목사.
“광주의 많은 오월 단체들이 있지만 참, 섹시 하지가 않은 겁니다. 조그맣고 버림받은 건물을 ‘오월정신’으로 채우는 게 오랜 꿈이었죠. 권정생 작가의 ‘강아지똥’ 처럼 냄새나는 존재에서 어여쁜 ‘꽃’을 피우는 쓸모가 생기기까지. 이 같은 가치들을 메이홀에 담고 싶었습니다.”

개관 10주년을 맞은 ‘메이홀’은 지금껏 관의 어떤 지원사업도 받지 않고 자생 중이다. 이곳을 사랑하는 이들에 후원금으로 운영되고 있다. 메이홀 간판에 ‘광주정신’이란 묵직한 네 음절을 앞에 둘 수 있음은 대쪽 같은 단단함이 자리하고 있어서다.

임씨는 공간의 힘을 믿는다. 치장된 외향 보다 꼿꼿한 정신과 사람이 자리할 때 비로소 공간의 미학이 드러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문화전당 모퉁이 골목에 버티고서, 광주의 80년 5월을 부단히 꺼내 들었다. 그에게 광주는 어린 시절 늘 곁을 지켰던 ‘형’과 같은 존재다. 떠날 수 없고, 떠나지 않아야 할 운명적인 것.

“이웃, 그리고 광주공동체에 투신한 삶이고자 했습니다. 5월을 알리는 것, 월드뮤직을 소개하는 일, 또 목회자로서의 삶 등. 어떤 일에서든 제 ‘몸’이 교량 역할을 했다고나 할까요. 작은 삶이라도 바치는 삶을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바쳐진 많은 삶들이 모일 때 세상은 조금 더 자유로워지리라 믿으니까요.”
북극 빙하 순례 중.
이와 결을 함께 하는 게 ‘이매진 순례자학교’다. 이매진은 외국 친구들이 부르는 임씨의 애칭이다. 이곳 ‘이매진 순례자학교’는 어른들을 위한 대안학교라 생각하면 쉽다. 특정 종교를 믿는 것은 당연히 아니고, 존레논 ‘Imagine’의 노랫말처럼 하나가 된 세상을 꿈꾸며, 노래처럼 살려는 이들의 모임이다.

그는 앞으로 우리 주변의 히어로들을 만나는 데 집중한다.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을 구술로 채록하는 프로젝트를 구상 중이다. 그들 삶이 얼마나 위대한지, 강한지를 보여주는 아카이브다. 이 시대 ‘공동체’의 가치가 무엇인지 서로를 만나야 알 수 있는데, 바이러스 탓에 그럴 수 없다면 이야기의 힘으로나마 만나게 한다는 것이다. 이 프로젝트를 계기로 예술공간의 색이 짙었던 ‘메이홀’이 시민사랑방 공간으로 변화가 시작될 것으로 예상된다. 더불어 10집 ‘여행자의 노래’ 앨범과 LP판 발매도 앞두고 있다.
인도 친구와 요가를 하고 있는 모습.
계획들을 술술 풀어내면서도 “그러나 훌쩍 떠나버릴 수도 있다”는 여지를 둔다.

“지난 날, 후회없이 한껏 살았습니다. 20대 신학교 생활까지 안을 채우며 살다, 용수철처럼 훅 튀어 올라 그 위치에서 또 열심히 했죠. 더 이상 오를 곳 없이 다 나와 버린 것 같기도 해요. 이젠 제 삶이 단출하고 단아해지고 있는 중이에요. 이후의 삶은 다시 안으로 침잠해서 고요하게 살아볼까 합니다. 커피 한잔 두고 고요한 시간을 맞아보고 싶어요. 그러다 또 힘을 받으면 세상으로 힘껏 튀어 오를 날이 있을지도 모르겠고요.”
박세라 기자 sera0631@gwangnam.co.kr        박세라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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