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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홍승 클래식음악 칼럼니스트 |
우리나라에 서양음악이 도입되기 시작한 시기는 불행히도 일제강점기부터였다. 일제강점기 때는 물론이거니와 해방 후에도 일본 유학을 다녀온 음악가들과 그 제자들이 한국의 여러 음악대학에서 고등 음악교육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런 잔재와 영향들은 1981년 해외유학 자유화 조치 이후까지 클래식 음악계 전반에 걸쳐 상당기간 지속된다. 우리가 어릴 때부터 음악시간에 듣고 자랐던 음악의 아버지 ‘바하’, 음악의 어머니 ‘헨델’이라는 설명은 다 일본에서 만들어진 말이다. 베토벤의 교향곡 제5번의 제목 ‘운명’도 마찬가지다. 지금 사용하는 KBS향, 서울시향 같은 줄임말도 일본에서 오케스트라 이름을 줄여서 불렀던 것과 같다. 예를 들면 NHK교향악단을 ‘N響(에누쿄)’, 요미우리 교향악단을 ‘요미響(요미쿄)’로 줄여 부른다.
나치 치하와 제2차 세계 대전의 전란 속에서 어느 편으로든지 줄을 서서 생존의 길을 찾아야 했던 유럽의 음악가들과 마찬가지로 1910년 일제에 의해 완전히 국권을 빼앗긴 조선의 음악가들의 처지 또한 위태롭긴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36년이라는 긴 시간의 식민지 세월 속에서, 더구나 사실상 독립의 가능성은 전혀 없어 보이는 절망적 상황 하에서의 선택의 폭은 더욱 좁았을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저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라도 해야 했었던 야만의 시대였다.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에서는 친일파 708인의 명단을 발표한다. 여기에 음악가 현제명과 홍난파가 들어있다.
현제명은 홍난파가 사망한 후 ‘한국 양악계(洋樂界)의 대부’로서 확고하게 독점적으로 자리매김했었다. 해방 이후 국립 서울대학교 예술대학 음악학부를 창설한 주역으로 한국 음악계 내에서의 지대한 영향력은 그가 죽은 후까지도 김성태 등 그의 제자들에 의해서 상당기간 이어졌다. 그의 친일행위는 1937년 6월 일제가 국내 사상탄압을 본격화하고 전시(戰時)체제를 획책한 ‘수양동우회 사건’ 이후 본격화된다. 그때 홍난파와 함께 검거된 현제명은 ‘사상전향서’를 작성하고 풀려난 직후 같은 해 7월11일부터 ‘조선문예회’ 신작가요 발표회를 통해 친일가요 등을 작곡, 발표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시작한다. 그는 일단 친일로 노선을 결정한 후부터는 가장 적극적이고 노골적인 친일 행각을 서슴지 않았다. 2차 대전의 막바지에 조선의 어린 학생들을 서울 시내의 공회당에 모아놓고 가미카제 자살특공대로의 지원을 독려하는데 앞장섰던 자들 중에서도 핵심적인 인물이었다.
‘봉선화’라는 곡으로 대표되는 홍난파는 현제명과 마찬가지로 ‘수양동우회’ 사건 후에 마침내 변절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최남선의 ‘정의의 개가’, 이광수의 ‘희망의 아침’ 등에 곡을 붙였으며 조선음악협회 등 친일음악단체 간부를 지내는 등의 행적을 통해 친일성향을 드러냈다. 그러나 홍난파의 친일 행적에 대해서는 자발적이라기보다 일제에 의한 탄압의 결과로서 그가 당시 처한 상황 등에 대해서도 진지한 고려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조선총독부가 그를 이화여전, 경성보육학교 등에서 차례로 해고했고 그의 사상전향을 위해 강제 구금을 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사실상 그에게 살아남기 위한 선택지(選擇肢)는 거의 없어 보인다. 어쨌든 그가 국내 서양음악의 여명기(黎明期)를 열었다는 점, 당시 사회 전체적인 몰이해(沒理解)와 무관심 속에서도 개인적으로 큰 비용 손실까지 감수하며 한국 최초의 서양음악회를 개최하는 등 계몽적 선각자의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점,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많은 활동과 업적들로 한국 근대음악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이라는 점에서 국내 음악학자들의 대체적인 결론은 홍난파의 공과(功過)는 선별적으로 평가되어야 한다는 쪽이다.
안익태는 ‘애국가’의 작곡가다. 그런 이유뿐만이 아니라 1919년 3·1운동관련 수감자 구출운동에 가담했다가 재적 당하는 등 명백한 독립운동 경력으로 인해 그동안 모든 이들에게 애국자로 인식되어 왔었다. 그러나 2006년 음악학자 송병욱에 의해서 완전히 다른 흐름으로 뒤집힌다. 그는 ‘알려지지 않은 두 작품’이라는 제목의 기고문을 통해 안익태가 만주국 창립 10주년 기념 음악회에서 작곡과 지휘를 맡았다고 폭로하며 안익태가 지휘한 영상을 독일 연방문서보관소에서 찾아 공개한다. 속속 드러나는 진실들 앞에 대한민국 사회는 충격에 휩싸였다. 안익태는 독일의 세계적인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제자였다. 1940년 초 일본은 슈트라우스에게 ‘일본 황실 존속 2600년 기념곡’을 위촉했고 안익태가 이곡을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비엔나 심포니를 지휘하여 연주했다. 조국의 독립에 대한 막연한 기대마저 거의 사라져간 시점에 동양의 무명 지휘자 안익태가 세계 유수의 교향악단 지휘자로 출세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앞에서 그 유혹을 쉽게 뿌리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형법 교과서에는 ‘기대가능성’이라는 형법상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이론이 나온다. 쉽게 말하자면 책임과 비난은 인간에게 적법한 행위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을 전제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1967년 우리나라 대법원은 어로 작업 중 납북되어 북한에서 찬양, 고무행위를 한 것은 살기 위한 부득이한 행위로 달리 행동할 기대가능성이 없다 하여 무죄를 선고한다. 그보다 훨씬 오래전 독일 연방 대법원의 유명한 판례가 있다. 1897년 이른바 ‘벽마(Leinenfanger)사건’이다. 마부가 고용주에게 꼬리를 고삐 줄에 감는 나쁜 버릇이 있는 말을 마차에 사용하지 말아줄 것을 수차례 호소하였으나 고용주가 이를 무시했고 오히려 해고하겠다고 위협했기 때문에 마부는 어쩔 수 없이 그 말을 계속 마차에 사용함으로써 결국 통행인에게 상해를 입히고 만다. 이에 대해 재판부는 생존과 직결되는 해고의 위험까지 무릅쓰고 말의 사용을 거부할 것을 마부에게 기대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 무죄를 선고한다.
요즘 나의 생각이다. 불과 수년전 ‘NO재팬’ 운동으로 국내에서 일본을 상징하는 도요다 자동차와 맥주를 산다는 것은 곧 친일 행위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아사히’든 ‘하이네켄’이든 맥주는 그냥 맥주일 뿐이다. 적어도 개인들의 여행지(旅行地)나 기호 식품 하나의 선택을 두고 친일로 규정하고 비난하는 것은 너무나 유치한 일이다. 마찬가지로 어느 한 인간의 생애 또한 그리 간단히 설명되거나 규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광남일보 gn@gwangnam.co.kr 광남일보 gn@gwangnam.co.kr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2026.07.29 (수) 07: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