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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규훈 약샘한의원 원장 |
1993년 개봉이니까 아주 오래된 영화이다. 원작 소설도 있다. 오래된 영화이니까 그냥 줄거리를 대충 이야기해보겠다.
배경은 1900년대 초이다.
목사에게 아들 두 명이 있다. 목사는 아들 두 명을 집에서 본인이 직접 가르친다. 그 시대에 맞게 상당히 엄격하게 가르친다. 그리고 동시에 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취미인 송어를 잡는 플라잉 낚시를 가르친다.
목사는 아들 두 명을 열심히 가르치지만 첫째 아이와 둘째 아이는 참으로 달랐다.
첫째 아이는 목사인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면서 성장한다. 물론 중간 중간 불만이 있지만 그대로 순응하고 성장한다.
둘째 아이는 다르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의 가르침에 대해서 본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받아들이지 않는다.
굉장히 흥미로운 장면이 하나 나오는데 어떤 기념일에 귀리죽을 먹는 것이 그 지역의 종교적인 관습이었는데 그 꼬마인 둘째 아이가 거부한다. 당연히 목사인 아버지는 분노하고 먹을 때까지 상당히 오랜 시간을 기다린다.
그런데 둘째 아이는 계속 거부하고 결국 아버지는 둘째 아이에게 귀리죽을 먹이는 것을 포기한다. 이 장면은 두 아이들의 인생을 보여주는 복선이다. 하지만 영화와는 별개로 이 장면은 아이들을 키워본 부모라면 굉장히 공감이 가는 장면이지 않을까 싶다.
아버지와 큰 아들, 작은 아들은 조금씩 다른 면은 있지만 낚시를 참 좋아했다. 특히 둘째는 아빠가 어렸을 때부터 가르쳐 준 방법이 아닌 자기만의 방식으로 낚시를 즐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방식으로 아빠보다 더 큰 물고기를 잡고 싶어 했다.
중간에 아이가 자라면서 하나의 사건이 발생한다. 배를 타고 폭포를 지나가 보자고 둘째 아이가 친구들과 형에게 제안을 한다.
처음에는 하겠다고 했던 친구들도 배를 타는 순간에 미쳤다고 다들 그만두고 형제가 도전을 하고 배를 타고 폭포 아래로 떨어지고 배는 부서지고 둘은 폭포를 통과한다.
이렇게 멋진 도전을 끝낸 후 형은 이 일에 대해서 아주 불편한 감정을 느끼고 동생은 이 일에 대해서 아주 들떠한다. 그러면서 둘은 이 사건 후 한 번 크게 싸운다.
둘은 대학에 진학을 한다. 형은 먼 대학으로 동생은 그 지역의 대학을 간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형이 대학을 마치고 돌아오니 동생은 대학을 졸업하고 신문사를 다니면서 도박에 중독돼 큰 도박빚을 지고 있었다.
형은 고향에 돌아와서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고 이후 다른 지역의 대학교 교수 자리를 제안받는다. 그리고 동생과 형, 아버지는 그 이야기를 듣고 축하해주고 세 명이 낚시를 한다.
그 곳에서 동생은 자신만의 낚시 방법으로 아주 큰 대물을 잡는다. 다들 기뻐한다. 며칠 후에 동생은 함께 떠나서 새롭게 시작하는 형의 제안을 거절하고 도박장으로 가서 도박을 하다가 총에 맞아 죽는다.
둘째 아들이 죽고 나서 아버지는 굉장히 힘들어 했다.
시간이 흐른 후 아버지는 어느 날 이런 설교를 한다.
그는 “사실 우리는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거의 돕지 못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베풀 것인지 얼마나 자주 베풀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설사 그들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완전한 사랑을 줄 수 있습니다.”
이제야 둘째 아이의 죽음을 조금은 흘려보낸 아버지이자 목사로서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 것 같다.
영화는 이렇게 끝이 난다. 우리는 가족이 있다. 우리는 이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지만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 많이 있다. 아니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가족이기에 내가 가지고 있는 가장 소중한 것을 주기 위해 나와 그를 동일시하는 우를 범하고 만다. ‘나와 똑같이 생각하고 똑같은 것을 원하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상대방의 반응에 크게 낙담을 한다.
물론 비슷한 것을 원하는 경우도 많이 있다. 하지만 다른 것을 원하는 경우도 많이 있고 얼마나 원하는 지도 다를 수 있다. 이렇게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 같다.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정말 힘든 일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사랑하는 아이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을 주는 것이 아니라 기다려주고 사랑해주고 인내해주는 것일 수 있다. 이해할 수 없지만 이해가 되지 않지만 사랑해야 할 존재가 그들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 속에서 우리는 매일 매일을 살아간다. 그들의 삶을 이해할 수 없기에 때로는 너무 고통스럽지만 그들의 인생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그리고 그것이 흘러가는 강물처럼 자연스러운 것일지도 모른다.
광남일보 gn@gwangnam.co.kr 광남일보 gn@gwangnam.co.kr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2026.07.29 (수) 07: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