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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호 시와사람 발행인 |
이런 현상은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의 숙명이다. 누군가를 쓰러뜨려야 식량을 얻을 수 있는 동물들의 세계도 마찬가지이다. 세계는 본질적으로 이러한 구조로 엮어져 있는, 이른바 자연의 섭리이기도 하다.
이렇듯 현실세계에서는 절대 다가갈 수 없는 것이 유토피아이지만, 인간은 끊임없이 유토피아를 지향한다.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를 통해 전쟁의 참혹함과 비극성을 보여주면서도 결국은 평화와 사랑의 메시지를 던진다. 자신의 조국 프랑스를 떠나 태평양의 타히티 섬으로 떠난 고갱은 문명과 욕망을 버리고 가공되지 않고 왜곡되지 않은 원시의 세계에서 우리가 근원적으로 추구하는 생의 본질을 그림을 통해 형상화했다.
그뿐인가. 최근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소설가 한강은 광주와 제주의 비극성을 통해 국가권력에 의해 짓밟힌 민중들의 모습을 서사화시켜 도전에 맞서는 희망을 전한다. 그 희망은 말할 것도 없이 좋은 세상이다. 국가권력이라는 거대한 폭력 앞에서 맞설 수 없는 작은 존재들이지만,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도전하는 용기는 인류가 지향하는 유토피아의 입구쯤에서 만날 수 있는 훌륭한 가치이다.
필자는 최근에 최서림(1955~) 시인의 첫 시집 ‘이서국으로 들어가다’를 비롯한 최근 시집까지 9권을 읽고 분석했다. 그가 설정한 시의 출발지이면서도 끊임없이 보여주는 장소인 ‘이서국’은 청도 지방에 있었던 부족국이다. 많은 평론가들이 ‘이서국’을 유토피아로 인식한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는 이서국은 여전히 전쟁과 불화와 욕망이 가득한 오늘 우리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이서국은 오늘 인간 세계의 판박이였다.
최서림 시인이 바라보는 세계는 ‘유토피아 없이도 살 수 있는 세계’이다. 즉, 유토피아가 너무도 아득한 것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유토피아를 지향하는 것이 그의 시 세계인 것이다. 이서국이 결코 유토피아가 아닌 이유는, 그것이 ‘역사 안’에 놓인 세계이기 때문이다. 역사 안의 세계는 인정투쟁이나 계급투쟁 같은 변증법적 대립이 일어나는 공간이다. 이서국은 ‘피비린내 나는 투쟁의 공간’으로, 오늘날 청도나 시인이 살고 있는 서울에서도 똑같이 반복되는 현실적 투쟁의 장이기도 하다.
결국 ‘역사 밖’이 존재하지 않는 이 현실 세계에서, ‘역사 안’의 세계 속에서 ‘역사 밖’을 꿈꾸는 것이 근대문학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근대문학은 태생부터 비극성을 안고 출발했다고도 볼 수 있다. 최서림 시인은 오늘의 현실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세계를 보여줌으로써, 불합리와 모순을 비판하고 그 대안을 모색하기 위해 쓰인 것이다.
역사를 이성적, 합리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는 믿음이 이른바 ‘진보사관’이다. 하지만 진보사관에서 벗어나야 비로소 진정한 자유와 해방을 얻을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인간 역사는 기본적으로 ‘회전’하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이 ‘나아감’은 단순히 ‘진보’만을 의미하지 않고 ‘진행’ 혹은 ‘전개’로 볼 수 있다. 고대 이서국이나 현재의 청도, 그리고 광주의 삶이 근본적으로 크게 달라지지 않은 채 반복되면서도 조금씩 앞으로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유토피아가 결코 지상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환상일지라도 인간이 추구하는 모든 예술은 유토피아를 그리워하고 그곳을 동경하며 나아가는 도전을 멈추지 않아야 한다. 그랬을 때 유토피아에 도달하지 못한다 해도 유토피아를 포기한 것보다는 보다 나은 세계를 만날 수 있다.
그러므로, 유토피아를 향한 지향점이 존재한다면, 우리 앞에 놓인 무수한 난제를 하나씩 해결할 가능성 역시 높아질 것이다. 과거 우리 선조들은 자연을 이상적 세계로 인식하고 그것을 자신들의 유토피아로 삼았다. 이에 반해 서구 낭만주의 자연서정시에서 자연은 ‘잃어버린 낙원’ 혹은 ‘회복하고 싶은 낙원’으로 그렸다. 하지만 우리에게 자연은 언제나 상존하는 낙원이며, 시적 자아가 심성수양만 하면 언제든 합일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즉, ‘실낙원’(失樂園)의 개념이 아닌, ‘복낙원’(復樂園)의 개념인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는 현실에서 직접 ‘낙원’을 만들 수 있다는 복낙원 개념을 바탕으로, 눈앞에 놓인 어려움을 극복해야 한다. 사회에서 소외된 이들을 위로하고, 병든 이의 어깨를 다독이고, 슬픔과 절망에 빠진 사람을 꼭 안아줄 때, 우리는 비로소 작은 유토피아를 경험하게 된다. 동시에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자 헌정질서를 교란시킨 나라의 지도자를 단죄해야 할 의무도 있다. 그것이야말로 국격을 세우고 파라다이스를 지향하는 일이며, 더 나아가 ‘유토피아 없이도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가는 출발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