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서양화단의 대가 원로 황영성 화백 별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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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서양화단의 대가 원로 황영성 화백 별이 되다

6·25한국전쟁 중 광주에 안착 독보적 회화 ‘가족 이야기’ 구축
사각형의 화면 평면 분할한 화폭 호평 국내외서 거목 반열 올라
교수·관장 등 미술발전 기여…미술인장례위원회 결성, 발인 30일

‘Family Story’(1996)
‘가족’의 근원적 그리움을 갈구해온 국내 서양화단의 대가 원로 황영성 화백(전 조선대 교수)이 27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5세.

6개월 여전부터 재활병원에 머물러온 그는 지난 26일 갑자기 상태가 위중해져 전남대병원 중환자실에 옮겨져 집중 치료를 받아왔으나 끝내 회복되지 못하고 하늘의 별이 됐다.

27일 별세한 황 화백은 형태를 단순화시켜 하나의 구성적인 가족도를 구축해 독특한 회화세계를 발현해 화단의 잇단 주목을 받아왔다. 그의 회화는 사각형의 화면을 평면 분할한 화폭으로 국내외에서 호평을 받으며 단박에 화단 중심으로 부각되면서 서양화단의 거목 반열에 올랐다. 평면분할된 사각형에는 물고기와 새, 집, 여자, 눈 등이 축소돼 배치돼 안정감과 다양한 스토리를 구현해냈다. 이를테면 하나의 이미지가 개체이면서 전체가 되고, 수많은 저체가 또다시 하나가 되는 순환고리가 매우 경쾌하고 리드미컬하게 표현돼 흥미를 유발했다는 점에서 형식적 다양성은 물론 내용적 깊이까지 더했다.

그가 생전 마지막 회화세계를 결산한 성격의 전시로는 2023년 전남도립미술관(2023.11.14~2024.2.18)에서 열린 ‘우주 가족 이야기’로 50년 회화인생을 반추했다.

황 화백은 초기인 1950년대에는 구상회화에 천착했으며, 2000년대 들어와서는 다양한 매체의 실험을 시도한 입체 작품을 발표했다.

그의 회화를 관통하고 있는 가족은 강원도 철원 출생으로 6·25전쟁 당시 광주에 정착한데서 비롯된 것으로 풀이된다. 6·25한국전쟁으로 인한 안온한 가족 및 고향과의 이별로부터 기인됐다.

작품 앞에 선 황영성 화백
2021년 무각사 로터스에 열린 부처님오신 날 기념 특별초대전 ‘소와 가족이야기’ 전시 포스터
황영성 작 ‘가족’
작가에게 가족은 소박한 시골집 가족에서부터 대자연의 뭇 생명들로 확대되고 마침내 세상 만물의 공생을 담은 ‘우주 가족’으로까지 확장됐다. 초창기 소와 가족, 마을, 개울, 들판, 외양간, 초가집 등 서정적이고 목가적이고 향토적인 소재가 주류를 이뤘다.

‘가족’에 대한 근원적 그리움에 바탕을 두면서 세상과 화폭을 잇는 다각도의 작품세계를 선보여온 황 화백은 남도 화단의 맥락 안에 있으면서 자신만의 독특하고 자유분방한 화법을 탐구해왔다.

작가는 1950년대 말부터 60년대까지 남도의 자연 교감과 감흥에 바탕을 둔 자연주의 구상회화에 천착했으며, 1970년대로 넘어와서는 마을과 가족의 개념을 회색조 회화로 변용시키는데 주력했다.

또 1980년대에는 마을과 산야를 넓게 내려다보는 부감 시점을 택하면서 싱그러운 생명력의 기운을 목가적인 녹색의 전원 풍경으로 표현한 작품을 주로 선보였으며, 유럽 곳곳의 해외여행과 더불어 고대 문명 탐방으로 펼쳐지는 작품을 잇따라 내놓았다.

2000년대 진입해서는 조형적 호기심과 탐구욕이 왕성하게 펼쳐지는 시기로 대형 설치작품을 작업했는데, 이는 우주 가족으로 확대된 천지만물의 도상들이 표현된 수많은 미러볼은 시공을 초월한 우주의 행성과 같은 형상을 담아냈다.

여기다 다양한 재료와 묘법을 통해 실험적 조형세계를 보여주는 가운데 중첩된 종이를 기하학적 곡선으로 잘라 붙이는 종이 드로잉과 실리콘 띠나 은색 알루미늄판 도상 표현, 대형 캔버스 가득 명시나 한시를 변형한 문자도 시리즈 등 다채로운 조형적 구성을 완성해냈다.

전남도립미술관 초대전 ‘우주 가족 이야기’ 전 포스터.
‘큰 가족도’(1986)
그의 평생 회화를 관통해온 숱한 ‘가족 이야기’들은 별세 직전까지의 활동에서 지속됐다.

황영성 화백은 강원도 철원 출생으로 조선대 미술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 1965년 나주 영산포에서 첫 개인전을 열고 난 이후 1967년 국전에 입선하며 6차례의 특선과 1973년 국전 문화공보부 장관상을 수상, 화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1990년대 이후부터 국내뿐만 아니라 미국, 프랑스, 독일, 중국 등 세계에서 작품성을 인정받은 바 있다. 조선대 미술대학 교수에 이어 정년 후 광주시립미술관장을 맡아 지역미술계에 헌신하기도 했다.

미술계를 중심으로 미술인장례위원회가 꾸려져 위원장에 최영훈 전 조선대 미술대학 교수와 조윤성 조선대 미술대학 교수가 맡았다. 발인 날 미술인들을 중심으로 추모사 등이 거행되고 황영성 화백의 운구행렬은 그가 평생 누볐던 조선대 미술대학과 조선대 본관, 서석동 작업실 등 주요 활동공간을 마지막으로 둘러본 뒤 영락공원으로 향한다.

유가족으로 아들 황정후, 딸 황지아·지은씨 등 1남2녀가 있다. 빈소는 광주 조선대학교병원 장례식장 2호실에 마련됐다. 발인은 30일 오전 8시 30분이며 장지는 광주시 선영. 문의 062-220-3352.
고선주 기자 rainidea@gwangnam.co.kr        고선주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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