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스트레스가 얼마나 심하면 설이나 추석 연휴 이후 이혼 소송 신청 건수가 눈에 띄게 급증한다고 한다. 가정에서 가사 일을 종종 돕기도 하는 젊은 세대의 남편들도 명절에 본가에 가면 어른들 눈이 무서워 부엌에 출입 못 한다고 하니, 이는 단순히 세대 간의 갈등 문제만도 아니다. 오히려 우리 한국사회에 뿌리 깊은 가부장적 악습이 지금도 강력하게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가부장적 가치관이 뼛속까지 박힌 남성들을 가리키는 용어로 ‘마초’가 있다. 한국에서 ‘마초’라는 말은 부정적 의미의 극대화로 비난의 표현이 된지 오래다. 요즘은 비난을 넘어 조롱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한 ‘마초’는 어떤 면에서는 ‘무뇌아’에 가깝게 그려지기도 한다. 그런데 필자가 만나본 여러 여성들 중 ‘마초’라는 말의 본래적 의미를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어떤 이는 ‘마초’가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장수 이름이라고 알고 있기도 했다.
‘마초(Macho)’는 본디 스페인어다. 명사로는 ‘남자’를 의미하며, 형용사로는 ‘남자다운’이라는 의미다. 그러나 마초는 단순히 젠더로서의 남성을 의미하는 단어(male)가 아니라, ‘성적 매력이 넘치는 남자’라는 섹슈얼리티를 내포한 단어이다. 무뚝뚝한 얼굴에, 울퉁불퉁 근육으로 뭉친 몸에, 거친 말씨를 쓰는 남자.
그러나 ‘마초=무뇌아’라는 비난은 편견에 불과하다. 마초이냐 아니냐는 한 남성의 지적 수준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마초’는 한 남자가 어떤 가치를 지향하는가에 달려 있다. 외모나 이미지가 아닌 가치관의 측면에서 보자면, 마초는 ‘남성적인’ 가치를 지향하고 숭배하는 사람이다. ‘마초’의 가장 적당한 한국어 번역은 ‘싸나이’일 것이다. 굳건한 의지, 강한 결단력, 넓은 포용력과 인화력, 때로는 불가능한 것에 목숨을 거는 낭만적인 열정 등을 추구하는 남자들. 갱스터 무비에서 알랑 드롱이나 알 파치노, 로버트 드 니로가 연기했던 배역들. 서구 철학자로 치자면 플라톤이나 니체, 마키아벨리 같은 남자들.
남성이 남성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문제는 남성중심적 가부장 제도의 오랜 역사 속에서, 남성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일이 나머지 가치들을 억압하는 일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특히나 한국처럼 봉건적 가부장제가 여전히 확고한 사회에서, 남성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일은 남성중심주의적 가부장제를 옹호하는 일이 되어버리기도 한다. 남자가 남자답기 위해서는 여성들을 억압해야 한다는 것, 남편이 가장답기 위해서는 아내와 아이들을 권위적으로 억압해야 한다는 것, 그런 억압과 횡포가 남성성의 본질이라 호도하는 가르침이 4000년 남성 가부장제의 역사를 지탱해온 동력이다.
이 가부장제에 길들여진 나이 든 중년의 남성들을 비하하는 요즘 말로 ‘아재’가 있다. ‘아재’는 아저씨가 가진 중립적인 혹은 긍정적인 의미가 제거된, 아집과 독선과 권의의식으로 뭉친 꼰대 같은 중년 남성을 비난하는 용어다. 우리 한국의 중년 남성들은 자신이 아재인지 아닌지 끊임없이 자문해볼 필요가 있다.
억압과 횡포만이 남성적인 가치가 아니라고 나는 믿는다. 그런 의미에서 ‘아재’들은 어쩌면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동정의 대상이 아닐까. 아내가 없으면 양말조차 못 찾아 신는 남자, 엄마가 없으면 밥 한 끼 못 차려 먹는 남자는 불쌍한 남자다.
독일의 철학자 F. 니체의 경구를 빌려오자면, “강인함은 남성의 본질이며 아름다움은 여성의 미덕이다.”라는 이 경구의 의미는 강인함이 아름다움을 희생시키면서 얻어진다는 것이 아니다.
남성적인 강인함을 추구하는 이 땅의 무수한 마초들이, 여성성이 지닌 여러 아름다운 미덕들을 짓밟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남성성은 여성성을 억압하지 않아도 그 가치를 획득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땅의 아재들이여, 오늘부터 가사노동을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