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은 밥벌이었고, 문화운동의 무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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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예술인

"음악은 밥벌이었고, 문화운동의 무기였다"

남도예술인(음악노동자 주하주)
열여덟 살 광주 밤 무대서 데뷔해 ‘반 백 년’ 노래
80년 5월 겪은 후 노래패 ‘친구’ 단원으로 활동
늦깎이 1집 앨범 발매…"거리의 악사로 살고파"

주하주씨는 “시대 상황에 소홀하지 않는 예술인이 되고 싶다. 해방 이후부터 민주화운동까지. 자신의 인생을 대가로, 정의를 지키려 했던 이들에 ‘노래’로서 위로를 전하고자 했다”면서 “앞으로 나이가 더 들어서도 노래 잘하고 기타를 잘 치는 악사가 되고 싶다”고 밝혔다.
그에게 노래는 인생의 무기다. 가난했던 유년시절엔 유일한 친구였고, 청년이 돼서는 생계를 잇는 밥벌이의 수단이었다. 이후엔 줄곧 더 나은 사회를 위해 노래하는 문화운동가로 마이크를 굳게 쥐었다. 방년 18세 광주 곳곳 밤무대에서 음악을 시작한 이래 머리가 희끗하게 샌 60대가 되기까지. 노래를 인생의 든든한 무기삼아 살아온 게 어느새 반 백 년이다. 흰 머리와 흰 콧수염을 휘날리면서 그는 여전히 노래한다. 5·18민주광장에서 또 그가 사랑해 마지않는 남광주시장에서. 이제는 백발의 버스커가 된 민중가수 주하주씨가 그 주인공이다. 이른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한 낮, 동구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자신을 ‘음악노동자’라 소개한다. 음악노동자라니, 어감은 왠지 거칠기만한데 인사를 건네며 웃는 그의 미소는 한 없이 부드럽다. 꼭 기타를 든 로맨티시스트처럼 보인다.

주씨 인생에서 음악은 자연스럽게 함께했다. 형편은 어려웠지만 흥이 넘쳤던 집안 내력 덕에, 가족행사가 있을 적마다 돌아가면서 노래를 불렀다. 초등학교 1학년 때 그는 일가친척들에 빙 둘러싸여 ‘동백아가씨’를 멋들어지게 뽑았다. 관객을 모신 무대 경험의 첫 기억이다. 그의 형은 중학생 때부터 기타를 쳤고, 주씨는 형의 기타 가방을 대신 메고 따라다니면서 어깨너머로 기타 연주를 배웠다. 이들 음악적 DNA는 판소리를 했던 어머니에게서 나온 것일 테다.

가수 주하주
어찌나 음악을 좋아했던지, 길을 가다가도 애창곡이 들려오면 노래가 끝날 때까지 움직이는 법이 없었다. 예전에는 길거리 리어카에서 테이프나 CD음반을 크게 틀어놓고, 팔기도 했는데, 등하굣길에 이를 마주치는 날에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실컷 귀동냥을 했다.

허나 그 좋아하던 음악이 ‘업’이 될 줄은 그도 몰랐다. 18살 때 처음 밤무대에서 알바를 했다. 직업가수로서가 아니라, 공부를 하기 위해서였다. 중학교를 시험 치고 들어갔던 때, 그는 수석입학을 한 수재였다. 허나 학비 댈 돈이 없어서 일을 해야만 했다. 남들은 주경야독한다지만, 그는 낮에 공부하고 밤에 무대에서 노래를 했다.

“음악노동자란 말이 딱이죠. 생계를 위해 무대에 섰으니까요. 학업을 잇고자 노래를 시작했는데, 결국 제 선택은 음악이었습니다. 어떤 연유로도 설명하기 어려운 운명적 끌림 탓이겠지요. 그러다 제 삶의 변곡점이자, 인생의 변화가 찾아옵니다. 피 끓는 20대 시절에 겪은 1980년 5월이 그것입니다.”

그해 5월21일 도청 앞 첫 집단 발포가 있던 날, 그는 시위대열의 8번째 줄에 서 있었다. 그날 총알은 그의 육신을 비켜갔지만 그의 영혼을 관통했다. 한 끗의 차이로 곁을 스쳐 간 죽음과 통곡의 외침은 오래도록 그의 가슴에 남았다. 노래가 사회변혁운동의 ‘무기’로 그의 인생에 장착된 순간이었다.

‘남광주에 나는 가리’ 발매 기념 콘서트 모습.
“그 이후, 이제 다른 노래들이 들려오더군요. 거리에서 울려 퍼지는 민중가요, 시대의 탄압을 받던 운동가요들이었어요. 음악을 하는 사람으로서 자세라고 할까요. 노래하는 방식이 자연스럽게 변화하더군요. 요즘은 잘 쓰지 않는 말이지만, 당시는 노래가 홍보, 선동, 계몽의 역할을 했어요. 어쩌면 저도 노래를 통해 깨어난 경우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그 또한 노래패 ‘친구’의 공연을 접하고서 본격 사회참여운동으로서 ‘행동’을 시작한다. 그 행동이라 함은, 자신의 진공관 앰프를 등에 지고, 노래패 ‘친구’ 사무실로 향한 일이다. 당시 ‘친구’는 ‘광주출정가’를 부른 고 범능스님을 중심으로 5월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노래했던 단체다. 주씨는 ‘친구’의 열악한 음향 장비가 마음에 걸려 자신의 것을 가져다줬고, 그렇게 ‘친구’에 합류해 활동하게 된다.

당시 그는 단원들과 함께 낮에는 거리에서 노래를 했고, 밤에는 비밀스런 곳에서 테이프 복제를 했다. 전국 대학들에서 민중가요 테이프 주문이 물밀듯 들어왔기 때문이다. 이들은 늦은 밤, 광주MBC 녹음 스튜디오를 빌려 ‘님을 위한 행진곡’, ‘아침이슬’, ‘광주출정가’ 등 소위 데모판에서 불리는 민중가요들을 제작했다. 말은 그럴싸하게 ‘제작’이지만 처음엔 가정용 카세트를 두고, 테이프를 하나 하나 본 떴다. 밤을 꼴딱 새 만든 테이프가 박스 채로 전국 대학가로 보내졌다. 투쟁 현장에서 노래하는 것 만큼 값진 일이었다.

‘남광주에 나는 가리’ 발매 기념 콘서트 모습.
1993년 노래패 ‘친구’는 해체됐지만 그는 줄곧 노래운동가로 살았다. 그의 대표곡 ‘남광주에 나는 가리’, ‘망월 가는 길’, ‘6월’, ‘땅으로 가자’, ‘해와 달’ 등은 반 백 년 인생을 축약해주는 단 결실들이다.

그 중 ‘남광주에 나는 가리’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이는 그가 60대 늦깎이에 처음으로 발매한 1집 앨범의 타이틀곡이기도 하다. 남광주역은 그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곳이다. 남광주역 근처에서 생선 장사를 하던 어머님의 잔상이 남아있는 곳이라서다.

“어머니 좌판에 들러, 돈을 타 튀김이며 과자를 사 먹던 철없던 날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 풍경들이 여전히 마음속에 남아있어요. 코로나19가 터지기 전에는 시간이 날 때 마다 남광주역 앞에서 버스킹을 벌였고, 기차 안에서 기타 강습회를 마련하기도 했죠. 남광주역이 제겐 너무 소중한 곳입니다.”

그러다 마주한 김용휴 시인의 ‘남광주에 나는 가리’가 그의 가슴에 꽂힌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는 그 자리에서 ‘시비’에 빼곡한 시를 메모지에 옮겨 적었고, 이는 늘 가슴팍 주머니에 자리했다. 계절이 여러 번 바뀌어 메모지가 너덜너덜해질 무렵, 드디어 마음에 드는 곳이 나왔고 그게 ‘남광주에 나는 가리’다.

공연중인 가수 주하주
주씨의 음악은 단단하면서도 마음을 건드리는 슬픔이 자리해 있다. 김준태 시인은 “노령산맥 억새풀밭에서 흘러내리는 듯한 ‘한’의 처연함을 담고 있어 민요적 뉘앙스가 나온다”고 평했다. 마디마디에 비색이 녹아있어 듣는 이에 깊은 울림을 주는 게 주씨 목소리의 힘이다.

그에게 노래는 마음을 담아내는 창이다. 하고 싶은 말들을 차곡차곡 아껴뒀다가 음악의 힘을 빌려 꺼내놓는다. 곡 ‘6월’에서 그는 사람다운 삶을 꿈꾸는 이상향을 노래했고, ‘땅으로 가자’는 그의 오랜 관심사인 통일의 염원을 담아 풀어냈다.

이와 함께 그가 부지부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민족문제연구소’ 활동 또한 이와 결이 같다.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고 그 안에서 상처받은 이들에게 위로를 건네는 게 주하주씨가 ‘음악노동’으로 기꺼이 해내는 일이다.

“시대 상황에 소홀하지 않는 예술인이 되고 싶어요. 해방 이후부터 민주화운동까지. 자신의 인생을 대가로, 정의를 지키려 했던 이들이 참 많죠. 그분들에 대한 국가적인 예우는 사실 부족하다고 봅니다. 그분들을 위해, 노래로 위로를 전하는 게 제 역할입니다. 그러면 몇몇은 뜨겁게 울고 또 몇몇은 박수로 제 노래에 보답해주셔요. 무대에서 그 눈빛들을 볼 때 사실 저도 큰 위로를 받고 있음을 압니다. 제가 지금껏 마이크를 쥔 이유이죠.”

그에게 꿈을 물었더니, ‘나이든 버스커’가 되고 싶다는 근사한 답이 돌아온다. 이젠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흰 수염과 머리가 뒷말을 잇는 것만 같다.

“더 나이 들어서도 노래 잘하고 기타를 잘 치는 버스커가 되고 싶어요. 마지막 꿈이랄까요. 지나는 이들의 마음을 훔치는, 거리의 악사로 천천히, 멋지게 살아가고 싶습니다.”
박세라 기자 sera0631@gwangnam.co.kr         박세라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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