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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호 시인·계간 ‘시와사람’ 발행인 |
그러나 현대에 와서 각종 미디어의 발호로 인해 시인은 늘어나는데도 불구하고 시를 읽는 독자들이 줄어들고 있다. 시가 인간의 정서를 풍요롭게 하고 시대의 변화를 잘 감지해야 할 서정이 왜곡되고 있어 안타깝다.
시는 새로워야 한다는 태생적 특성이 시를 갈수록 어려워져 독자들을 떨쳐내고 있다. 이러한 차제에 20여 년 전부터 이른바 디카시(Digital Camera Poem)가 우리 시단에 출현하여 대유행하고 있다. 디카시는 한자어 시(詩) 앞에 ‘디카’라는 외래어가 붙어서 만든 합성어이다. 디카시론을 정립한 이상옥 교수는 “새로운 언어관을 토대로 한 영상과 시의 하이브리드 문학, 혹은 퓨전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즉 디카시를 기호시라고 볼 수 있다. 영상 이미지인 사진이 시의 중요한 기능을 맡고 있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등장한 사진시는 사진이 시를 설명해주는 부차적인 성격인데 반해 디카시는 사진과 시가 작품을 이루는 데 대등한 역량을 발휘해야 한다. 즉 사진과 문자가 만나 완전한 텍스트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디카시의 요체는 순간의 감흥과 영감을 사진으로 포착하고 문자언어로 형상화해야 한다. 이때 포착한 영상이미지는 ‘날것의 이미지’여야 한다고 이상옥 교수는 필자와의 대담에서 밝혔다.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시쓰기와 시 읽기는 솔직히 버겁다. 시를 쓰는 시인은 물론 독자들이 대하는 ‘시’라는 예술장르가 불편하다. 오랜 시간 시가 차지해 온 낭만적 서정의 영토가 왜소해지고, 그 설 자리를 점점 잃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의 위기’라고 불리는 시대에 디카시의 등장은 매우 유용하다.
과학 문명의 발달로 인해 누구나 언제든지 스마트폰으로 손쉽게 감흥을 포착할 수 있어 시의 위기를 타개할 방법이 될 수도 있다. 그러한 결과 오늘날 많은 사람이 디카시를 쓰고 있어 고무적이다. ‘디지털’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직접 사진을 촬영하고 메신저나 SNS 등을 통해 바로 수많은 사람에게 노출해 신속하고 광범위한 파급력이라는 매력이 있다. 한국디카시인협회가 창립되고 많은 디카시 동인회가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심지어는 디카시를 공모하는 신춘문예는 물론 문예지도 생겨났다. 디카시를 논하는 학술대회도 해마다 열리고 있어 이른바 디카시시대를 활짝 열었다. K-컬쳐의 한 주자가 되어 디카시가 해외로 확산되며 문학 한류로 자리잡고 있다.
그렇지만 디카시가 극복해야 할 일이 산적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디카시의 날것, 날시성은 사물의 상상력, 혹은 신의 상상력을 더 중시한다는 의미도 있다. 이런 점에서 디카시는 사물이나 자연, 혹은 신의 말을 전달하는 에이전트로서의 디카시인의 기능이 우세하다고 이상옥 교수는 말한다. 시인의 상상력이나 개입은 최소화되고 사물의 그것이 최대로 확대해야 한다는 점에서, 시인이 자연이나 사물에서 포착한 시적 영감이나 감흥, 형상을 손상없이 다중언어로 표현한다는 관점을 지닌다.
하지만 오늘 우리 시단에서 생산되고 있는 디카시는 과연 디카시의 본질, 또는 정체성에 합당한 것들인지 의문스럽다. ‘날것의 언어’는 인간의 이념이 개입된 언어가 아닌 절대적 순수의 감정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필자가 보아온 대부분의 디카시는 사진시와의 변별력을 찾기 힘들다. 5행 이내의 짧은 형식만이 기존의 사진시와 다를 바 없는 디카시라고 불리는 것들이 주류를 이루기 때문이다.
SNS를 통해 동시에 소통하는 것도 드물지만, 주로 종이책을 이용하여 소비되고 있는 점은 기존의 사진시와의 변별력을 구별하기가 힘들다. 자연스러운 생활 속에서 만나는 시적 감흥(날것의 언어)보다는 디카시를 쓰기 위한 억지가 눈에 띄는 것이 사실이다. 심지어는 시인 자신이 사진 속에 등장하는 경우도 허다하다.(디카시는 시인이 직접 찍어야 한다. 그런데 누군가가 대신 사진을 찍어준다면 디카시가 아니다.) 그리고 사진을 찍어놓고 나중에 사진에서 시적 감흥을 쥐어짠 흔적들이 역력한 작품들도 있다. 심지어는 남의 사진을 가지고 시를 쓰는 시인들도 허다하다.
디카시도 본질적으로는 서정시이다. 사진과 문자를 텍스트로 한다고 해서 시가 지닌 서정을 외면하지 않기 때문이다. 디카시라는 것이 누구나 접근하기 쉽다고 해서 디카시라는 이름으로 마구 양산하는 모습을 대하면서 시적 감흥을 만나기 힘든 현실이다. 이는 시의 본질을 망각한 처사이다. 디카시를 쓰는 시인들이 디카시를 쓰기 전에 먼저 간절한, 감흥이 있는 참된 ‘서정’이 무엇인지를 알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