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아리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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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칼럼

항아리 미학

김명화 교육학박사

김명화 교육학박사
[아침세평] 붉게 물든 석양에 얼굴을 담았을까?

길가 담장 밑에 붉은 깃을 세운 맨드라미꽃 태양의 열기에 붉은 물이 가득 들었다. 해거름에 나무 그늘에 앉아 붉은 태양의 노을빛을 담은 맨드라미 꽃대를 보면서 가을을 기다려 본다.

풀벌레 소리는 가을인데 햇살은 아직도 여름이다. 예전에는 나무 그늘에 서면 견딜만한 여름이었는데 요즘에는 동남아보다 더 습한 기온에 외출하면 걷는 것은 잠깐이고 에어컨 바람 시원한 카페에 앉아 여름을 보내기 일쑤다.

휴가를 맞이해 득량만이 보이는 보성으로 향했다. 득량만으로 가기 전에 오봉산이 보인다. ‘오봉산’이라는 이름이 재미있어 방향을 돌리니 ‘초루’ 간판이 보여 무작정 길을 따라가 보니 메타세쿼이어 나무가 하늘을 향해 뻗어 있다.

호기심에 계속 길을 재촉하니 산 중턱 너른 양지에 항아리가 장관이다.

2500개의 항아리가 놓여 있는 장독대에 식초가 익어간다. 살짝 비가 내린 뒤 숲이 조용히 잠들자 저 멀리 노루가 뛰어다닌다. 물안개가 산 위로 스멀스멀 올라간 하오 항아리가 햇살을 맞아 숨을 쉬고 있다.

초루 산 중턱 너른 벌판에 볼록한 배를 가진 항아리가 정겹다. 흙으로 빚어 가마에서 구운 항아리는 보성 미력 항아리 장인 이학수 작품이다. 품이 넉넉한 엄마 허리 닮은 항아리가 놓여 있는 정경만으로도 아름답다.

항아리는 옹기다. 옹기는 숨을 쉰다. 마당이 있는 집에 살았다면 항아리에 대한 기억이 있다. 장독대에 있는 간장 옹기에 소금 꽃이 필 때가 있다. 이는 간장에 있는 나쁜 성분이 빠져나오는 것이라며 어른들은 항아리에 담긴 간장, 된장이 맛있게 익어간다고 했다.

그 익어간다는 의미를 이제는 알 것 같다.

보성 미력의 옹기는 만들 때 쓰는 흙부터 다르다. 숨을 쉬는 항아리를 만들어내는 과정도 쉽지 않다. 흙을 쳐서 옹기를 만들기까지 수백 번의 장인의 손질을 거친다.

옹기는 도자기와는 다르다. 도자기는 밀가루처럼 입자가 고아서 숨을 쉬는 항아리와는 다르다. 옹기는 흙을 이어서 만든다. 옹기 자체로 허점투성이처럼 보이지만 굽기 과정에서 연기농도에 따라 숨을 쉬는 항아리로 만들어진다.

보성 미력 김학수 장인이 만든 옹기는 만들어지는 과정도 채 바퀴 타래 기법으로 소나무 장작으로 옹기를 구워낸다. 흙을 때려서 만드는데 이 과정에서 흙의 불순물을 제거한다.

또한, 흙과 흙을 연결하며 주걱으로 때려가면서 옹기를 만들어 물레 위에서 장인의 정성은 이어진다. 잿물도 소나무를 태운 재와 약토 넣은 잿물 탕에서 잿물을 입히고 햇살에 잘 말려 전통기법으로 굽는다.

옹기 굽는 과정에서 불을 지피는 과정이 힘들어 가스 불로 만든 옹기는 숨 쉬는 정도가 분명히 다를 것이다. 그러므로 소나무 장작으로 제대로 구운 옹기는 정화작용을 하여 숨을 쉬는 항아리가 되는 것이다.

햇살이 내리쬐는 여름날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지면 어머니는 항아리를 행주로 닦으셨다. 아무리 바빠도 아낙네들은 항아리를 반질 나게 닦았다. 장독대 항아리가 항상 깨끗해야 음식도 맛이 나고 사람 사는 냄새가 난다.

햇살이 잘 드는 장독대 항아리는 낮에는 햇살이 와서 놀다 가고, 밤에는 달님이 와서 놀다가 갔다.

눈 오는 날이면 장독대 뒤에 하얀 눈이 소담스럽게 눈이 쌓이는 풍경이 주는 운치는 어떻게 언어로 설명할 수 있을까?

언제부터인가 아파트에 살면서 장독대 있는 풍경은 점점 사라져 버려 산 중턱 너른 벌판에서 항아리를 보는 것만으로 감탄사가 나올 수밖에 없다.

보성 오봉산 자락 항아리가 펼쳐져 있는 벚나무 길을 걷는다.

사부작 길을 걸으며 외롭게 산을 지키는 팽나무를 만나면 쉬어가도 좋다. 팽나무 아래서 앉아 있으면 풀숲을 뛰어다니는 방아깨비도 정겹다. 저 들판에 앉아 있는 항아리도 수많은 풀벌레의 사연을 들으며 식초가 익어가고 있을 것이다.

항아리는 오랫동안 우리의 삶에 필수품이었다. 자신을 과시하지도 않으면서 군더더기 없는 단순함과 질박함으로 아름다움을 표현한다.

사람도 항아리 같아야 한다. 옹기종기 모여 있어야 아름답다. 우리의 삶에 쓰임의 미학, 항아리를 통해 고유한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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