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예술’도 잘만 한다면 돈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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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칼럼

‘순수예술’도 잘만 한다면 돈이 될 수 있다.

백홍승 클래식음악 칼럼니스트

백홍승 클래식음악 칼럼니스트
[문화산책] 오스트리아의 비엔나는 ‘빈 필하모닉오케스트라’, 독일의 베를린에서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뮌헨에서는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이나 ‘뮌헨 필하모닉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들어 보는 것이 이 도시를 방문한 해외 관광객들의 필수 코스 중 하나다. 관광객들이 열광하는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자기 나라에서는 들어 볼 수 없는 수준의 오케스트라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들 도시의 공통점은 세계 탑 클래스의 오케스트라를 보유하고 있다는 점과 이를 토대로 이루어낸 도시브랜드라는 점이다. ‘순수예술’이 돈이 되는 가장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자칭 ‘문화수도’ 광주에는 국내외 관광객들의 발길을 이끌만한 세계적 수준의 예술단체가 있는가. 아쉽게도 솔직히 말하자면 없다. 국내 관광객이 자기들 도시에서도 볼 수 있는 비슷비슷한 수준의 공연을 굳이 여기까지 와서 보려고 하지 않는다. 외국인의 경우도 비슷하다. 5·18 관련 다크 투어리즘(Dark tourism)이나 향토음식, 광주비엔날레 정도가 그나마 관심거리라고 할 수 있다.

관광객이 찾는 해외 유명 극장 운영의 예를 살펴보면 극장의 조직 속에 오케스트라, 합창단, 발레단이 함께 있어 오페라나 발레 공연 때 협업하는 것이 주된 업무이며 극장에 소속된 오케스트라의 연간 공연 일정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에 따르는 장점은 장르별 전문성이 개발돼 오페라, 발레 공연에 완전히 특화된 오케스트라와 함께 수준 높은 공연물을 제작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바꿔 말하면 교향곡이나 협주곡 위주의 전형적인 클래식 공연 프로그램을 연주하는 오케스트라는 따로 있다는 뜻이다.

시민들 스스로가 독일의 ‘문화수도’라고 자부하는 뮌헨을 살펴보자. 뮌헨 주립극장(국내에서는 뮌헨 국립극장이라고도 한다.)에는 오페라단과 발레단의 공연 반주만을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주립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이 있어 모든 공연을 전담하고 있다. 이와 별개로 전형적인 클래식 음악회만을 진행하는 뮌헨 소재의 오케스트라로는 국내에서도 유명한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 이밖에도 뮌헨 필하모닉, 뮌헨 심포니 등이 있다.

이 오케스트라들은 오페라나 발레 공연의 반주는 하지 않는다. 가까운 일본 도쿄의 ‘신 국립극장’ 오페라단, 발레단의 경우 상주 오케스트라는 없지만 근래에는 ‘도쿄 필하모닉’이 전담하고 있다. 현재 광주예술의전당은 각 단체들의 형편대로 가능한 범위 내에서 협업하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엄밀히 따지면 앞서 기술한 해외 유명 극장들과 같은 전문성을 갖추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그러니 광주시 정도의 도시 사이즈(도시 경제력에서는 차이가 크지만 인구 등이 뮌헨과 비슷하다.)이고 소위 ‘문화수도’를 표방하고 있다면 예산상의 부담은 있겠지만 시립발레단, 오페라단과의 협업 등을 위한 별도의 오케스트라가 하나쯤 따로 운영되었으면 한다.

아시아에도 아시아를 넘는 수준의 오케스트라가 있을까. 지구상 가장 유명한 클래식 축제 중의 하나인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이 1920년에 시작된 이래 지금까지 아시아에서는 일본의 NHK교향악단, 요미우리 니폰 심포니오케스트라 단 두 개의 오케스트라가 초청되었다. 이 오케스트라들은 발군의 연주력으로 이미 유럽 일류 오케스트라 수준에 근접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중 필자가 특히 ‘요미우리 니폰 심포니’에 대해 주목하는 것은 그동안 일본 중간 수준에 불과했던 평범한 오케스트라가 매우 짧은 기간에 이루어낸 비약적인 발전과 성과 때문이다. 향후 ‘광주시립교향악단’의 롤모델로 삼아 여러모로 벤치마킹 해볼 가치가 있다고 여겨진다. 요미우리 니폰 심포니는 일류 교향악단으로의 도약을 위해 뉴욕필, 빈 필과의 교류사업을 지속적으로 진행했고 스타니슬라브 스크로바쳅스키,쿠르드트 마주어 등 거장 급의 해외 지휘자들을 초빙하는 방식으로 그들의 브랜드 가치를 나누어 가지면서 청중들에게 어필했다.

정년을 보장받고 인건비를 포함하여 모든 운영 예산을 시에서 부담해주는 국내의 ‘시립교향악단’이라는 제도는 운영의 안정성 면에서는 완벽하다. 대부분의 예술단체가 법인(法人)인 세계적 경향들과 비교해 보았을 때도 매우 드문 운영 사례이고 큰 혜택이다. 이러한 운영 방식은 지방정부가 시민들의 문화 향유권 보장을 위해 오케스트라를 공공재(公共財)로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겠다.

그러나 전국의 지자체에서는 뜨거운 감자인 ‘법인화’ 카드를 검토하기 시작 한지 이미 오래다. 아마 시간문제일 뿐 국내 수도권의 오케스트라들처럼 언젠가는 지방 대부분 시립교향악단의 법적 성격도 법인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이견(異見)도 있겠지만 법인화를 통한 예술단체의 발전 방향이 최선이라는 것은 공연계 현장의 전문가들 대부분과 예술경영 관련 학계의 통설이다. 이렇게 반발하는 예술가들도 있을 것이다. 순수예술에 경영 논리를 덧씌우는 것은 무식하고 야만적이라고.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아해 보이는 예술가들이라고 물만 먹고 살 수는 없다는 점이다. 자유 시장 질서가 엄연한 자본주의국가에서 예술가들의 수입을 책임지고 있는 예술 수요자들(관객)의 요구에 실력으로 당당히 응해야 할뿐더러 국내외에서 끊임없이 치열하게 경쟁하면서 발전해야 한다. 해외 유명교향악단과의 교류나 거장 지휘자의 초청에는 돈이 들어가니 그냥 우리끼리 열심히 하면 발전하고 성장할 수 있다고 말하는 이도 있겠지만 2002년 월드컵을 냉정하게 돌이켜 보자. 히딩크 감독 없이 우리가 4강을 이루어낼 수 있었을까.

광주시향의 상임지휘자 선정방식은 단원들의 의견을 적극 반영한 청빙 제도인데 이것은 과거 지방정부 시절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사례를 들어가며 요구했던 광주시향 노조의 주장이 관철되면서 생겼다. 그런데 ‘베를린 필’의 경우는 단원 한명 한명이 솔리스트급의 역량을 갖춘 세계 최고의 교향악단 ‘베를린 필’이기 때문에 세상 어느 누구도 토를 달지 않는 것이다. 이같이 특별한 예가 한국 지방 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 선정 과정에서 그대로 인용되고 있다는 것은 미안하지만 상당히 오버다. 시 측에서는 인사권자가 시장이니만큼 지휘자 선정에 대해 주도적으로 인사권을 행사했으면 한다. 시에서 마음만 먹는다면 거대한 행정조직을 이용하여 세계 전역을 대상으로 하는 리서치와 조건 협상 등의 전문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감당할 수 없는 세계적 불경기에 유럽 쪽 실력 있는 지휘자들의 자존심과 콧대가 예전에 비해 낮아졌으며 까다롭던 계약 조건들도 양보의 폭이 크게 넓어지고 있다.

어쨌든 광주 시민들은 시의 세금으로 운영되고 있는 시립예술단 중 한두 개의 단체만이라도 세계적 수준으로의 획기적인 성장과 발전을 바라고 있으며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는 도시가 브랜드화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래서 유럽에 나가지 않더라도 ‘월드클래스’의 공연을 가까이서 볼 수만 있다면, 또 반도체나 자동차 수출 말고도 ‘순수 예술’이 도시의 수입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실감될 때 비로소 시민 어느 한 사람도 세금 아깝다는 말은 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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