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韓江), 광주, 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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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칼럼

한강(韓江), 광주, 독서

김진구 광주교육시민협치진흥원장

김진구 광주교육시민협치진흥원장
[아침세평] 가을이 왔다. 춘하추동 사계절이었는데 여름과 겨울, 투 시즌의 세상이 멀지 않을 것 같다.

어렵게 찾아온 가을과 함께 군산으로 향했다. 광주학부모 문학기행이다. 열정 넘치는 광주의 엄마들과 동행이다.

들녘이 놀짱하다. 지난 여름의 긴 더위 때문인지 벼들이 지친 듯 서 있다. 이 풍경도 차창의 속도만큼이나 순간에 사라질 것이니 얼른 눈에 담으시라고 말했다.

베고, 묶고, 나르고, 홅고, 담는 가을걷이 식순은 오래전 일이다. 농번기는 우리 세대까지 짊어진 몫이었고, 이제는 콤바인이다.

금강은 전북 장수군에서 발원한 물줄기이다. 반도를 거슬러 말굽 편자 모양으로 흐르다가 서해 노을에 잠긴다.

금강은 맑은데 하구에는 소설가 채만식의 ‘탁류’가 흐르고 있다.

탁류는 흐린 물이다. 일제가 수탈하고 남긴 가난과 백성들의 고단한 나날에 물들었으리라. 생채기처럼 박혀있는 녹슨 두 가닥 폐철선을 밟으며 군산항 째보선창을 걸었다. 무겁게 걸었다.

쌀 투기의 미두(米豆) 현장과 조선은행 군산지점을 둘러보는 학부모들 표정은 칙칙했다. 한숨이었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되어 그 시절로 되돌아간 듯했다.

한 학부모가 말했다. 아침 집을 나설 때 남편과 잠깐 언짢았는데 ‘탁류’의 채봉을 생각하면 자기는 호강이란다. 나도 그렇다는 듯 함께한 모두의 눈동자가 조금 커졌다.

채봉의 일생은 시대와 탐욕이 만든 질곡의 더블헤더였다. 문학 작품은 궁극적으로 독자 각각의 삶을 반추하는 거울 역할일까.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에 나온 사진관 앞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오후에는 미당 생가를 갔다.

선운사의 서출동류(西出東流)를 건너니 시인 서정주의 문학관이다. 국화꽃을 피우고, 신화와 설화의 구비를 생활 언어로 조탁(彫琢)한 ‘질마재 신화’의 고향이다.

미당의 시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를 좋아한다.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 아니라/ 만나고 가는 바람 같이...”

우리 일행은 그렇게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광주로 돌아왔다. 광주 학부모 첫 문학기행이었다. 또 함께 가고 싶다고 했다. 주변에 널리 알리겠다고도 했다.

광주시교육청은 올해부터 독서·인문학교육 강화를 위해 ‘다시 책으로’라는 프로젝트를 역동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아침 시간, 창체 시간뿐만 아니라 교과 시간도 활용해서 학생들이 독서가 생활화되도록 반복하고 있다. 학창 시절의 독서 습관은 평생 지속되기 때문이다.

이번 학부모 문학기행도 이 30여개 사업 중 하나다. 학부모와 자녀가 함께하는 학·자협치학교에서는 벌교 태백산맥 무대를 다녀왔으며, 통영의 박경리 ‘김약국의 딸들’도 만나고 왔다.

학생과 학부모뿐만 아니라 전 시민으로 확대돼 우리가 내 건 구호처럼 ‘광주는 독서 중∼, 시민과 함께 다시 책으로’가 펼쳐지기를 소망한다.

이 원고를 쓰는 중에 소설가 한강의 노벨문학상 소식이 들려왔다. 한강은 ‘소년이 온다’고 했는데, 스웨덴의 노벨은 ‘한강이 온다’는 것이다. 예년에는 후보자가 거론되기도 했는데 예측 기사도 없었다.

어느 평론가는 지난 2014년 첫 출간된 ‘소년이 온다’ 뒤 표지 추천사에 이렇게 썼다. “한강을 뛰어넘은 한강의 소설이다”고. 참 대단한 예견이다.

그렇다. 지금 한강을 뛰어넘어 세계가 출렁이고 있다. 두툼하게 빛바랜 노벨상 전집에 한강의 작품이 실릴 것을 생각하니, 실감이 나지 않는다.

발표 후 그의 행적은 한림원이 표현한 ‘시적 산문’처럼 전 세계의 이목을 더 끌고 있다. 한강의 자축은 아들과 차 한 잔이었다. 전쟁인데 무슨 인터뷰고 잔치냐고 했다. 여기저기서 세운다는 문학관에 이름도 쓰지 못하게 했다.

다만 우리가 꿈꿔온 멘트가 나왔다. “광주라는 도시가 시민이 책을 많이 읽는 도시가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소설집의 에필로그 ‘눈 덮인 램프’에서 광주 북구 중흥동 호남전기(지금의 구호전) 긴 담벼락 건너편 집에서 태어나 삼각동으로 이사한 후 1980년 1월 서울 수유리로 떠났다고 밝혔다. 광주효동초등학교 3학년을 마치고서다.

이미 독서교육을 본격 추진하고 있는 광주시교육청 이정선 교육감은 “한강의 작품은 역사, 인권, 인간애에 대한 깊은 성찰로 광주 학생들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는데 큰 역할을 할 것이다”며, “5·18광주정신을 한 권의 작품으로 세계화한 위대한 작가다. 광주가 낳은 노벨상의 작가와 광주교육은 함께할 것이다”고 했다.

불티, 싹쓸이, 품절··· 한강의 책을 인쇄하는 소리가 밤낮으로 들리는 듯한 오늘의 조국이다.

내년 광주학부모와 학생들의 문학기행은 바뀔 것 같다. 한강의 아버지인 소설가 한승원의 ‘해산토굴’과 ‘당신들의 천국’ 이청준을 찾아 ‘장흥’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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