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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언 음악감독 |
1. 1984년 지방에서 만들어진 최초의 음반 ‘예향의 젊은 선율’
1984년 10월에 만들어진 ‘예향의 젊은 선율’ 음반은 당시 지방에서 만들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음반이다. 당시에는 음반을 만들어 낸다던지 가수를 꿈꾸는 사람들은 모두 서울에 올라가 대형 음반사나 기획사의 도움을 받아야만 음반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시대였다. 하지만 여러 가요제를 석권하던 광주의 유능한 음악 선배들은 지방에서도 음반을 만들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고 힘을 합쳐 ‘예향의 젊은 선율’이라는 음반을 만들어 냈으며 이 음반에는 ‘소리모아’(박문옥·박태홍·최준호), 김종률, 김정식, 김원중, 신상균, 배창희 등의 광주 젊은 음악인들이 직접 만들고 부른 소중한 음악이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그 열정에 힘입어 앨범의 여러 곡이 히트했는데 대표적으로 ‘바위섬’을 손꼽을 수 있다. 이 음악들은 광주의 소중한 유산이 되어 후배 뮤지션들에게 광주음악의 자부심을 느끼게 하고 많은 영감의 모티브가 되었으며 이후에 대한민국 지방음악의 시초로 평가받는 소중한 앨범이다. 앨범 발매 40주년이 되는 올해 10월 나는 또 다른 후배 음악인들과 함께 예향의 젊은 선율 40주년을 기념하는 공연을 열었으며 공연을 준비하는 과정과 결과 모두 행복했던 기억이 있다. 또한 이 후배들이 이 공연의 영향을 받아 내년에는 광주캠퍼스 음악들을 리메이크하는 공연을 준비한다고 하니 이 또한 너무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2. 89년의 역사를 지닌 국내 유일무이한 단관 극장 ‘광주극장’
충장로에 위치한 광주극장은 무려 90년 가까운 역사를 자랑한다. 1930년대 중반에 광주에서 영화를 볼 수 있는 공간은 ‘제국관’이란 곳이 있었다. 하지만 제국관은 일본인이 경영하는 극장이었기 때문에 조선인이 경영하는 영화관이 필요하다는 의식이 생겨나기 시작했으며 이에 광주극장이 1933년 법인을 설립하고 1935년 10월 1일 당시 최초의 발성 영화였던 ‘춘향전’을 상영하며 개관하였다. 광복 이전의 광주극장은 영화를 관람하는 공간만이 아닌 조선인의 소통과 공론의 장소였다. 광복 이후에는 새로운 국가 건설을 모색하는 집회 공간으로서 그 위상을 더욱 드높였다. 6·25 전쟁 시기에도 영화 상영을 멈추지 않았다. 비록 1968년 큰 화재로 건물이 전소되는 안타까운 사고가 있었지만 1960년대에는 가장 흥행기를 누렸다.
1990년대 이후에 전국의 극장들이 멀티플렉스로 변모하거나 폐관한 상황 속에서 광주극장은 현재 국내에 남아있는 유일무이한 단관 극장이다. 내년 개관 90주년을 바라보는 대한민국 극장사의 독보적 존재라 평가할 수 있는 광주극장에 많은 시민들이 찾아주고 지켜줘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나는 음악을 하는 사람으로서 한 달에 한 번씩이라도 광주극장에서 영화음악콘서트나 인문학콘서트를 진행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얼마 전 무등산을 오르는데 타 지역에서 등산을 오신 분들이 내 외모를 보고 산을 자주 오는 사람처럼 보였는지 무등산에 얼마나 자주 오냐고 물어보신다. 나는 일주일에 5일 정도는 가볍게 무등산을 찾는다고 했더니 부러운 눈빛으로 하시는 말씀은 의외였다. ‘무등산처럼 좋은 산이 가까치 있어서 참 좋겠어요.’ 그렇다. 나는 가까이 있는 무등산을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타 지역에서 오신 분들은 이런 좋은 산이 도시에 있어서 언제든 가까이 두고 찾을 수 있다는 것이 부러운 것이다. 나는 언제부턴가 조금 시간적인 여유가 생기면 광주를 벋어나 다른 곳으로 떠나기 바쁘고 유명 관광지를 찾기에 혈안이 된다. 가까이에 너무 멋진 광주를 놔두고 말이다. 새삼스럽게 광주를 가로지르는 광주천도 오늘따라 유난히 맑고 깨끗해 보인다. 이번주 토요일에는 광주극장에서 영화를 보며 90년의 영화역사를 고스란히 느껴보고 근처의 광주공원 포장마차에 들려 젊은이들이 나누는 이 시대의 이야기도 엿들어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