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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경 문학박사·문화기획자 |
1950년대 여성국극을 모티브로 전개되는 이 드라마는 한국전쟁 직후의 혼란 속에서 국극 배우를 꿈꾸는 목포 출신 ‘정년이’의 여정을 따라간다. 그녀는 어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소리 실력을 발판 삼아 국극단에 입단하는데, 다양한 여성 인물들과의 갈등, 그리고 갈등을 넘어서는 연대를 통해 성장해 나간다. 이 과정에서 6·25전쟁의 아픔을 겪은 민중들에게 위안을 주었고, 여성들에게는 사회적 해방감을 제공했던 여성국극의 면모를 살펴보는 것 역시 또 다른 묘미이다. 실제 국극 무대처럼 생생하게 재현된 공연 장면은 시청자들에게 큰 호평을 받고 있다.
여성국극은 1948년 여성국악동호회의 결성이 출발점이다. 당대의 국악계는 남성 중심의 체계가 강했는데, 남성 중심의 기득권에 대한 대안으로 판소리 여류 명창들이 주축이 되어 결성한 것이 여성국악동호회이다. 초대 회장은 박녹주가 맡았으며 김연수, 임유앵, 박귀희, 김소희 등이 참여했다.
1950년대에 이르러 전성기를 맞게 된 여성국극은 화려한 무대 장치, 음악, 연극적 요소를 결합한 총체극 형식으로 발전했다. 전쟁으로 지친 대중들은 이러한 공연을 통해 잠시나마 현실 세계의 정서적 남루함을 잊고, 무대 속 권선징악의 상황을 즐길 수 있었다. 특히 남장 여배우의 등장은 당시 여성 관객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는데 남성 역할을 맡은 여성 배우들은 전통적인 성 역할을 뒤집으며 자유로운 애정 표현과 강인한 캐릭터를 선보였다. 이를 통해 여성 관객들은 자신을 둘러싼 사회적 규범과 구속에서 잠시나마 해방감을 맛보았을 것은 자명하다.
화려한 여성국극의 전성기를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인물은 임춘앵이다. 전남 함평 출신인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소리와 춤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고, ‘여성국악동호회’와 ‘여성국극동지사’에서 남장여배우로 활약하며 큰 인기를 끌었다.
임춘앵은 무대 장치와 의상, 분장에 세심한 신경을 기울이며 종합 예술로서의 국극을 선보였는데, ‘옥중화’, ‘해님 달님’, ‘청실홍실’, ‘공주궁의 비밀’, ‘춘향전’ 등이 대표적 작품이다. 특히 ‘춘향전’은 국악과 오페라 양식을 결합한 공연을 시도하며 당시 공연문화에 새로운 지평을 열기도 했다. 단순한 전통 판소리 공연을 넘어 대중성을 확보하기 위한 각고의 노력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노력에도 여성국극의 인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1950년대 후반부터 등장한 영화와 텔레비전 같은 새로운 미디어의 등장으로 결국 여성국극은 쇠락을 길을 걷게 된다. 특히 영화 산업의 급성장은 공연 예술 전반에 큰 타격을 주었고, 여성국극도 예외가 아니었다. 국립국악원, 국립극장 등을 통한 정부의 예술 지원 정책에서도 여성국극은 제외되었다.
드라마 ‘정년이’는 잊혔던 여성국극과 판소리의 성장을 재조명하고 있다. 정년이의 인기 비결은 흥미로운 캐릭터와 탄탄한 스토리뿐만 아니라, 우리가 잊고 지내던 전통 공연 예술을 다시 조명한 점이다. 단순히 과거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작품이 아니라, 여성국극이라는 우리 문화의 잊힌 한 페이지를 다시 펼쳐보게 한 점은 현대인들에게 전통 예술의 가치를 재발견할 수 있는 기회가 된 셈이다.
최근 몇 년간 문화 소비의 패턴이 급격히 변화하면서, 주류 문화와 비주류 문화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있다. 특히 과거처럼 주류와 비주류를 명확히 구분 짓기보다는, 저마다의 취향을 존중하며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시대가 비로소 열린 것이다. 이제 OTT 플랫폼은 드라마 ‘정년이’를 글로벌 무대로 안내하며, 더불어 판소리에 대한 세계인의 관심까지 이끌어내고 있다.
광주에도 수많은 ‘정년이’들이 있다. 여전히 전통을 잇고 새로운 도전을 통해 자신의 예술 지표를 확장해나가는 그녀들이 있다. 드라마 ‘정년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그녀들에게 새로운 희망의 징표가 되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