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에 마음 담아…원 없이 노래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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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에 마음 담아…원 없이 노래했죠"

[남도예술인] 소프라노 김미옥
1987년 국립오페라단 데뷔 이후 주역 ‘활약’
로마 예술음악원서 수학·서정적 ‘미성’ 특징
‘문화도 복지’ 신념…기부·후학양성 등 매진

김미옥씨는 “노래하는 것 자체가 삶의 이유였고, 원동력이었다”며 “마음이 따뜻한 성악가, 제자들을 사랑하는 성악가로 기억되고 싶다”고 말했다. 최기남 기자
성악은 온 몸 근육을 활용하는 예술이다. 두 다리의 탄탄함과, 배부터 성대를 감싸고 있는 목의 근육을 지나 두성의 울림까지. 힘을 받아야만 흔들림없는 소리를 낼 수 있다. 무대에서 노래하는 성악가들을 자세히 본 일이 있다면 틀림없이 알아챌 수 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또 정확한 소리를 내기 위한 그들의 고군분투를. 화려한 의상 너머로 전해오는 강렬한 전율을 말이다.

소프라노 김미옥은 40여 년을 무대에 선 성악가다. 1987년 국립오페라단 ‘델루조씨’ 주역으로 첫 데뷔를 한 이래 14편의 오페라에서 주역을 꿰찼고, 9번의 독창회, 400여회의 음악회에서 활약했다. “정말 원 없이 노래했다”는 그는 여전히 현역이다.

최근 봉선중앙로에 자리한 ‘김미옥 성악 연구소’에서 그를 만났다. 인사를 나눈 뒤 앉자마자, 그의 40년 노래인생이 풀어져 나온다. 조곤조곤 말을 하는 것 뿐인데, 꼭 한 소절의 노래를 듣는 것 마냥 듣기에 편안하다.

여느 예술가처럼 그의 어린 시절 또한 특별했다. 음악에 조예가 깊었던 어머니는 늘 거실 전축에 한국가곡을 틀어놓았다. 자연스럽게 귀로 들었고, 어느 날부터는 노래로 흥얼거렸다. 어머니는 그의 흥얼거림에서 재능을 읽었다. 곧장 손을 잡고 MBC 합창단 오디션을 봤고, 바로 합격했다. 이처럼 노래에 타고난 끼가 있었지만 처음부터 성악을 전공할 생각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공부도 곧잘했던 그는 국문과에 뜻을 뒀다. 글을 읽는 것도, 쓰는 것에도 재미를 붙였던 그였다. 그러나 특별한 ‘목소리’는 그의 음악 선생님들을 욕심나게 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음악선생님이 소리를 들어보고선, ‘너 같은 애가 성악을 해야지’라면서 적극 권유하셨어요. 부모님을 만나 설득하시고요. 선생님과 준비한 첫 콩쿠르에서 금상을 받았습니다. 본격적으로 시작하기도 전부터 떡 하니 상을 받으니 ‘이 길이 내 길인가?’ 마음을 바꾸게 됐죠.”

오페라 ‘라보엠’에서 주역 ‘미미’로 공연하고 있는 모습.
그렇게 발을 디딘 성악에서 김씨는 날개를 달았다. 목포대학교 성악과 첫 입학생으로 들어가 수석 졸업을 했다. 김씨의 졸업 후의 행보가 놀랍다. 1987년 국립오페라단이 처음으로 공개오디션을 실시, 주역을 뽑았는데 그때 김씨가 ‘델루조씨’에서 주역으로 발탁된 것. 심지어 이 시기는 김씨가 첫째 딸을 출산한 지 불과 반년도 안됐을 때다. 출산 후, 완벽한 복귀를 알린 것이다.

이후 ‘사랑의 승리’를 비롯해 예술의전당 개관기념 공연으로 올랐던 ‘시집가는 날’에서도 주역을 맡았다. 지역 출신의 성악가가 중앙 무대에서 이토록 주목을 받은 일은 드물다. 그는 지역에서 보다 서울에서 더 주목을 받았었다고 회고했다.

“당시엔 이태리 유학 공부를 하기 전이었어요. 언젠가 한번은 무대를 마치고 내려왔는데, 미국에서 박사 학위까지 받으신 한 동료가 ‘선생님은 어디서 공부했어요?’라고 묻기에, ‘저는 한국산이에요’라고 답했죠. 클래식계에서는 유학을 다녀오지 않았다는 건 꽤 흔치 않은 케이스였죠.”

유학에 대해 고민하자, 가족들이 나서줬다. 당시엔 김씨의 첫째가 초등학교 1학년, 둘째가 막 돌을 지났을 무렵이었다. 아이들 때문에 주저하자, 남편이 적극 나서 다녀오라고 용기를 줬다. 그렇게 1993년에 유학을 가 2년간 이태리 로마 예술음악원에서 공부를 했다. 가족과 일 등 여러 상황들에서 벗어나 오직 성악 공부에 매진할 수 있었던 귀한 시간이었다.

돌아와서는 전성기를 보냈다. ‘라보엠’, ‘아이다’, ‘나비부인’ 등 오페라 주역으로 무대에 섰다. 그의 타고난 소리와 아름다운 외모, 또 감정연기를 더한 오페라 무대에서 그는 가장 빛을 발했다. 특히 라보엠의 ‘미미’는 그가 꼽는 인생 캐릭터다.

김씨는 하늘이 내려준 ‘미성’을 가졌다. 억만금을 주고 사려고 해도, 피나는 노력을 행한다 해도 얻을 수 없는 게 있다면 바로 이런 것이다. 목소리가 곧 악기인 성악가에게 아름다운 목소리란 무엇보다 중요한 무기다. 특히 김씨의 소리는 따뜻하고 서정적이어서 큰 사랑을 받는다. 기교적인 부분 보다, 사람의 마음에 가 닿게 노래하는 김씨의 진심이 통한 것이다.

“참 편안한 소리를 가졌다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소프라노는 높은 음역대를 노래하다보니, 듣기에 조금 힘든 부분이 있을 수도 있거든요. 제 노래를 듣고 뭉클했다는 칭찬을 들을 때면 가장 기분이 좋죠.”

나이를 먹어가면서 그의 목소리 또한 익어갔다. 성악의 전성기라 할 수 있는 30대 중후반에 그는 “입만 벌려도 소리가 나올 때”라고 표현했다. 그만큼 에너지가 넘치고, 그 자체만으로도 반짝이는 소리가 뻗어 나온다는 의미다. 40대 후반 그리고 50대를 지나면서는 ‘힘’ 보다는 내공에서 비롯되는 농익은 소리가 또 다른 매력이다. 여러 음악을 많이 다뤘기 때문에 음악성 부문에서 깊어진 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UN세계 고아의 날’ 기념 음악회 무대에 선 김씨.
“독창회를 하면서 참 소리공부를 많이 했습니다. 한국가곡은 물론이고 이태리, 독일, 스페인 등 다양한 나라의 노래를 각 언어로 표현해야 하니, 깊이 있게 들어가야 하죠. 1시간 공연을 위해 1년을 준비합니다. 무대에선 자신있게 노래하자는 게 제 철칙이에요. 자신감이 없으면 호흡이 불안정해지고, 감정 선도 드러낼 수 없죠. 끊임없이 연습하는 것만이 정답이에요.”

무대는 그를 가장 설레게 하는 공간이다. 공연장에 올라 관객 한 명 한 명의 시선을 받다보면 저 아래서부터 뜨끈한 열정같은 것이 들끓는다. 그가 광주의 많은 음악인들과 재미난 음악회를 펼치는 것 또한 바로 무대가 주는 희열을 못 잊어서다.

지난 11월5일 광주문화예술회관 소극장에서는 그가 주축이 돼 창단한 ‘펠리체솔리스트 성악회’가 무대에 올랐다. 이들은 광주 각 명소를 콘셉트로 한 음악들을 선보여 큰 박수를 받았다. 이날 음악회에서는 ‘광주의 노래’, ‘임을 위한 행진곡’, 춘향가 중 ‘쑥대머리’를 비롯해 미스터트롯으로 큰 사랑을 받은 임영웅의 ‘바램’과 영탁 ‘찐이야’ 등을 편곡해 선보였다. 장르의 다양화는 물론 스토리까지 입히자, “광주를 향한 종합선물세트 같다”는 평가를 받았다.

지난 11월 공연 후 가족들과 함께.
“올해로 91세가 된 우리 어머니가 오셔서 보시곤 너무나 좋아하셨어요. 딸 공연 보는 맛에 산다고 하셔요. 엄마 덕분에 음악을 할 수 있었고, 또 엄마가 있었기에 지금의 제가 있는 겁니다. 제가 음악 활동하는데 남편의 외조가 큰 힘이 됐고, 엄마에 대한 딸과 아들의 자부심, 적극적인 지지가 제 성악 인생에 큰 버팀목이었죠.”

60대에 접어들고, 이제 노래를 그만 할 때가 되지 않았나 자문할 때가 있다. 실제 그처럼 무대에서 현역처럼 노래하는 경우는 드물다. 체력에서부터 오는 한계 탓이다. 하지만 김씨는 예외에 속한다.

“가장 냉철하게 제 목소리를 평가하는 게 제 자신입니다. 흔들림이 느껴진다면 아름답게 퇴장할 마음을 가지고 있어요.”

어차피 무대 밖에서도 할 일은 많다. ‘문화도 복지다’라고 믿는 그는 사회복지 부문에도 큰 관심을 둔다. 지난해엔 데뷔 40주년을 맞아 음악인들과 함께 ‘재일한국인 양로원’을 후원하는 사랑나눔 콘서트를 마련, 2000만 원을 기부하기도 했다. 이처럼 김씨는 음악으로서 할 수 있는 기부, 후학들에게 기회를 주는 음악회 등에 열심이다.

“마음이 예뻐야 아름다운 소리가 나올 수 있습니다. 제 마음을 꼼꼼히 ‘점검’하는 이유이지요. 평생 음악을 하면서 참 행복했습니다. 음악 하는 것 자체가 제 삶의 이유였고, 원동력이었으니까요. 마음이 따뜻한 성악가, 제자들을 사랑하는 성악가로 기억되고 싶어요. 저는 다시 태어나도 음악을 할 거예요.”
박세라 기자 sera0631@gwangnam.co.kr        박세라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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