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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고을 대풍류’ 무대를 마치고 인사하는 황 명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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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세계문화축제’에서 국악인들과 함께한 황 명창 |
“긴 세월 동안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어요. 힘들고 지칠 때는 있었어도 제 길이 아니었던 적은 없었습니다.”
황승옥 명창은 국악과 동행해온 지난날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는 그야말로 외길인생만을 걸어왔다. 삶은 배움과 도전의 연속이었다.
마산에 있는 가야금 교습소에 다니던 11살 때부터 시작된 국악과의 인연은 지금까지 이어졌다.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가야금 산조를 배웠고, 졸업 후 광주시립국악원에서 가야금을 비롯해 판소리, 아쟁, 시조와 무용 등을 두루 배웠다. 고 박귀희, 안숙선 명창에게 가야금병창을 사사하고 조통달, 이연옥, 강문득, 이영희, 선영숙, 성심온, 방성춘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돌이켜보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을 방에 틀어박혀 쉬지 않고 공부해왔습니다. 지금껏 수많은 스승님들을 만나 은혜로운 가르침을 받았기에 지금의 제가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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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문화관에서 연주를 선보이고 있는 황 명창 |
“선생님께서 ‘성음이 너무 좋아 소리를 따라와봤다’고 하셨죠. 제가 ‘산조에 만족을 못 느끼고 소리도 하고 싶습니다’라고 말씀드리니까, 박귀희 선생님을 소개해준다고 하셨습니다.”
국가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병창 보유자로 ‘국악의 어머니’라 불리는 고 향사 박귀희 선생은 당시 서울에서 운당여관을 운영하며 후학을 양성하고 있었다. 박 선생은 잔뜩 긴장한 채로 ‘꽃사시오 꽃사시오’하고 민요를 부르던 황 명창을 너그러이 제자로 받아줬다. 그토록 배우고 싶던 가야금병창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 때였다.
황승옥 명창은 1995년 전주대사습 가야금병창 장원을, 2001년 경주신라문화제 전국국악대제전 대통령상을 수상하던 때를 생생히 기억한다. 꿈에 그리던 대사습 경연. 대기실에 앉아 무대를 기다리는 내내 초조한 마음에 물 한 모금도 제대로 넘기지 못했다. 얼마나 긴장을 했는지 머릿속이 새하얘진 탓에 준비한 가사는 한 소절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대사습은 하늘의 별 같은 사람들만 나가는 줄 알았어요. 가사를 잊어버리고 급한 마음에 어떻게 무대에 섰는지도 모르겠어요. ‘나 같은 시골 사람이 할 수 있을까’ 두렵기도 했죠. 국악 등용문이라 불리는 대회에서 꼭 인정받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이겨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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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금병창전집 1권 |
각종 대회에서 상을 타고 경력이 쌓일수록 어깨는 무거워져만 갔다. 누군가 ‘대상 수상자가 저것 밖에 안될까’라는 생각을 할까 봐 부담도 컸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마음을 다잡고 묵묵히 제길을 걸었다. 매년 발표회를 열고 부지런히 기량을 쌓았다. 무언가 되고 싶다기 보단 좋아하는 일에서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제 무대에 ‘감동스럽다’, ‘잘한다’는 소리가 들려왔어요. 내가 가고 있는 길이 맞구나 생각했죠. 이 말들이 무너지지 않기만 바랐어요.”
수많은 무대에 오르면서 가슴 벅찬 순간도 많았다. 국악은 어느 순간부터 삶의 이유가 됐다.
“90년도 미국에 한국전쟁 참전용사 메달수여식을 다니던 때였죠. 참전용사가 입원한 요양병원에서 성주풀이 진도 아리랑을 부르는데 몇 십 년 동안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던 분이 기적처럼 반응을 보였어요. 그밖에도 아리랑을 부를 때 울면서 함께 박수치며 듣던 참전용사들의 모습… 아직도 생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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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금병창전집 2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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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금병창전집 3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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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승옥 명창은 “해외 공연을 다니며 우리 전통 음악이 세계에 통한다는 것을 느꼈다. 그 과정에 정부의 지원이 절실하다”면서 “국악인들의 노력에 힘을 실어주고 관심을 가져줬으면 한다”고 밝혔다. |
“석사과정 논문을 준비하는데 관련 선행연구가 한 권도 없었어요. 그래서 ‘내가 책을 내야겠구나’ 생각했죠. 오성을 그리는 능력도 없었는데 대학원에서 배운 실력으로 더듬어가며 썼어요. 제 피와 땀이 만든 책이에요.”
판소리는 긴 스토리가 있는 반면 가야금병창은 짜임새가 짧은 악곡으로 구성된다는 특징이 있다. 황 명창은 판소리의 긴 이야기를 그대로 수용, 가야금병창으로 재탄생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다. ‘수궁가’와 ‘춘향가’ 등의 판소리 곡을 가야금병창 레퍼토리로 재구성하는 일이다. 지난 6월 빛고을국악전수관에서 발표한 독주회에서는 새롭게 만든 ‘흥보가’ 초입 부분을 선보였다. 기존의 ‘흥보가’ 가야금병창에 초입 부분을 더해 만든 무대였다.
도립국악원 단원과 대학교수 및 저서 출간에 각종 국내외 초청 공연까지. 지금껏 누구보다 바쁘게 살아왔지만, 하고 싶은 일은 아직 많다. 그는 “시간이 갈수록 우리 음악에 대한 책임감이 더 커진다”고 말했다.
“국악에 대중화 열풍이 불면서 대중과 친숙한 방향으로 변화해가는 것을 반갑게 생각합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전통이 무너지지 않게 해야겠죠. 그렇기에 선생님들의 귀한 소리로 공연을 올리고 꾸준히 국악을 알리는 노력이 필요해요.”
<>황 명창은 전통 계승과 국악의 저변확대를 위해 2001년 (사)한국전통문화연구회를 설립했다. 가야금병창과 판소리, 민요 등 우리 음악의 선율을 통해 대중에게 다가서는 공연예술단체로, ‘대한민국 빛고을 기악대제전’ 및 ‘빛고을 대풍류’ 등 매년 다양한 공연을 열고 있다.
이중에서도 지난해 20회를 맞은 ‘대한민국 빛고을 기악대제전’은 올해부터 대통령상으로 격상된다. 대회의 위상을 높이고 규모를 키우기 위해 수년 동안 애써온 황 명창의 노력이 만든 결과다.
“여러 해 동안 관련 기관과 국회의원을 찾아가 설득하고 또 설득했습니다. 민속악의 고장 호남에 규모있는 대회가 있어야한다고요. 덕분에 올해부터는 행사를 더 크게 열려고 합니다. 학생들이 꾸미는 전야제 공연도 하고요. 국악하는 청년들이 꿈과 재능을 펼칠 수 있는 무대를 많이 만들어줘야죠.”
한국전통문화연구회는 2018년 세종전통예술진흥회와 공동으로 ‘LA 판소리 경연대회’를 열기도 했다. 이후 코로나19가 터지면서 공연을 이어가지 못했으나 올해부터 다시 준비 중에 있다. 황 명창은 우리 전통 음악이 더욱 인정받고 주류화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면서 정부와 지자체의 도움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해외 공연을 다니면서 우리 민속 음악이 분명 세계에 통한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 과정에 정부의 지원이 필요합니다. 기악대제전의 경우만 해도 대회에 대한 재정적 지원이 거의 없어 사비로 운영하고 있는 상황이에요. 국악인들의 노력에 힘을 실어주고 관심을 가져줬으면 합니다.”
그는 가야금산조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고 우리 음악의 가치가 인정받게 되길 꿈꾼다. 국악의 세계화에 대한 가능성을 분명히 읽었기 때문이다.
“몇 해 전 이스라엘에서 열리는 세계문화축제 무대에 선 적이 있어요. 각 나라마다 화려하게 무대를 꾸며 전통 공연을 열고 소품을 팔기도 하죠. 비교적 초라했던 한국관 무대에 올라가 한복을 입고 병창을 하는데 소리에 매료된 관객들이 전부 몰리더라고요. 그 순간 어찌나 자랑스럽고 뿌듯하던지요. 음악은 만국공통어라고 하잖아요. 우리 전통음악이 가진 힘을 저는 믿습니다.”
김민빈 기자 alsqlsdl94@gwangna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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