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서정의 감각으로 삶을 풍요롭게
검색 입력폼
전문가칼럼

새로운 서정의 감각으로 삶을 풍요롭게

강경호 시인·계간 ‘시와사람’ 발행인

강경호 시인·계간 ‘시와사람’ 발행인
[문화산책] 온갖 악재에 부딪혀 한동안 불안과 우울의 나날을 보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더 이상 자신을 방치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스스로를 일으키는 무엇인가를 붙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마침내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그림을 떠올렸다. 서양화 전공자지만 수십 년 동안 방치해 둔 서재의 화집을 뒤지고, 이젤, 물감, 캔버스를 찾아 먼지를 털었다. 굳어버린 물감은 삭막하게 변해버린 나의 서정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오랫동안 헤매다가 마침내 출구를 찾은 듯 어두운 마음 속 깊은 곳에 빛이 들어왔다.

그림을 그려야겠다는 마음은 있지만 아직은 본격적으로 붓을 쥐지는 못한다. 수십 년 동안 해 온 삶의 틀을 깰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여전히 문예지 만들기, 문학비평, 잡문 쓰기가 내 권태로운 생활의 견고한 일상인 까닭이다.

화집을 보고 다시 미술사를 읽는 것만으로도 잃었던, 잊었던 길을 다시 찾은 느낌이어서 불안과 우울의 늪에서 헤어 나오고 있다. 그리고 문학과 미술의 융복합에 관한 글을 쓰고 있다. 문학과 미술을 함께 경영하는 작가들을 찾아 그들의 예술을 규명하며 문학과 미술의 만남, 문학과 미술의 영역 확장 등을 시도하는 나의 시선은 인접예술끼리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에 머무르곤 한다.

살펴보면 의외로 문학을 하면서 그림을 그리거나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 눈에 띈다. 유명 배우나 가수들 중에서도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이 있다. 한때 시장사람들이 그림을 그려 전시회를 하기도 하였고, 농사를 짓는 시골 할머니가 시를 쓰거나 그림을 그려 시집을 펴내기도 하고 전시회를 하기도 했다는 보도를 읽은 적이 있다. 예로부터 음악 영역은 접근하기 편하게 인식되었지만, 문학이나 미술은 특별한 전문가들의 영역으로 인식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오늘날은 ‘고급한 예술’이라는 굴레가 씌어졌던 문학과 미술의 경계는 허물어졌다. 오랫동안 넘볼 수 없었던 특권의 담장이 허물어진 것이다. 넘볼 수 없어 늘 고개 들어 우러러 보았던 성채가 무너졌다고나 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장르와 장르 사이에는 두꺼운 벽이 존재한다. 문학가는 미술가나 음악가를 모르고, 미술가는 문학이나 음악을 모른다. 그러므로 자신의 예술만을 경영하다보니 장르간의 벽이 생길 수밖에 없다. 하물며 같은 장르, 즉 소설가는 시를 읽지 않고, 시인은 소설을 읽지 않는다. 이러한 현상은 현재 우리 예술가들의 실상이기도 하다. 그러나 근대 이전 서구의 예술이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이른바 선비는 책을 읽고 시를 쓰고 그림을 함께 하였다. 산수화는 물론 문인화의 전통은 시·서·화를 함께 섭렵함으로써 예술을 이해하는 것을 넘어 인간다움을 깨닫고 우주와 자연, 그리고 인간의 조화를 이루려고 애를 썼다.

앞에서 밝혔듯이 우리 주변에는 여러 장르를 함께 하는 예술가들이 늘어가고 있다. 어떤 분은 시·문학비평·사진·그림을 동시에 창작하는 분이 있다. 그 분의 시는 루이스의 말처럼 ‘시로 쓴 그림’ 또는 ‘그림으로 그린 그림’으로 읽힌다. 인간의 삶은 물론 우주와 자연의 섭리 속에 인간 존재를 규명하고 있다.

이렇듯 여러 장르를 함께 수행하다 보니 장르간의 소통이 원활하여 서로가 영감을 주어 높은 지경의 깨달음에 이르른다.

최근에 평생 시를 써온 시인이 그림전시회를 한다고 소식을 전해왔다. 그의 그림을 보며 깜짝 놀랐다. 자신이 읽은 문학작품 속의 빛나는 한 장면들을 캔버스에 이미지로 형상화시킨 것들이었다. 쌩떽쥐베리의 ‘어린 왕자’의 순수한 동심들이 정제된 시각문체로 형상화되어 있었다. 뿐만아니라 자신이 평생 일군 시의 엣센스들을 그림으로 그렸다. 화면을 간결하게 처리하다보면 자칫 이미지의 감성이 단순화되어 밋밋한 느낌을 줄 수 있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오히려 주제를 강화시켜 메시지가 선명했다. 그리고 그만의 색채가 새로운 서정을 불러일으켜 이른바 시적(詩的) 감성이 맑은 동심으로 다가와 세상에서 찌든 마음들을 정화시키는 정화기제로 작용하여 마음이 맑아지는 효과를 보인다. 평생 국문과 교수로 살아온 시인의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가 분명했다.

시와 그림이 만나 시에서 느껴보지 못한 새로운 서정이 불안과 우울의 수렁에 빠진 나의 영혼을 헹궈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림을 전공하지 않은, 그래서 제도권에서 순치가 안 된 그래서 그의 내면에서 오래 잠들어있는 참신하고 때묻지 않은 서정이 오히려 신선한 감각으로 되살아날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긋지긋한 일상이 불안과 불면, 그리고 권태를 밀어내고 새로 돋아나는 새살 같은 생명의 환희는 현대인 누구에게도 절실한 감각이다. 이러한 감각을 일깨우는 문학·미술·음악, 그리고 여러 장르의 예술은 그저 전문가 영역만이 아니라, 누구나 쉽게 자신만의 목소리로 소통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조금 서툴거나 어색하여 세련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까짓것 눈치 볼 일이 아니다.
<ⓒ광남일보 (www.gwangnam.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