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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나루 ‘시와사람’ 부주간 |
그래서일까? 죽음에 대해서 다룬 수많은 문학작품들에서는 탄생, 삶을 또한 중요하게 다룬다. 그리고 은연중에 잠을 죽음에 대한 비유와 상징으로 곧잘 사용한다. 예수가 죽음에서 사흘 만에 부활하는 종교적 상징이 그 대표이다. 때문에 잠은 죽음과 의미가 통한다. 잠은 생명이 잠들 때 하루 내 달군 몸을 이완하며 에너지를 비축한다. 죽음 또한 몸을 흙으로 흩어내며 에너지를 땅에 쌓는다.
어릴 적 기흉으로 병원에 있을 때는 하루에도 여러 번 자고 일어나길 반복했다. 새벽같이 엑스레이를 찍기 위해 병원을 활보하고 다녔기 때문에 깊게 자지 못한 탓이다. 전에 살던 집의 아래층 아주머니는 심각한 불면증이 있어 몇 달을 전전긍긍하다 우리에게 대학병원을 다니고 있는 고통스러운 처지를 하소연하며 협조해 달라 부탁했었다. 이미 전해 들어 조심하고 있는데 더 이상 어떻게 해야하느냐 갑갑한 생각이 들었지만, 겨우 잠들 듯 싶으면 이런저런 소란으로 깨길 반복하던 병원생활을 떠올라 그 처지를 안타깝게 여겼었다.
생판 남인 이웃 사람들에게 하소연할 정도면 이미 가족도 고통을 분담하고 있었을 것이다. 본인이 의도하지 않은 질환 때문에 가족에게 고통을 주는 어머니의 심정이라니 안타까울 수밖에 없다. 하루를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하고 고통스러워하니 그 연결점인 다음 날의 시작 또한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고, 하루의 연속인 삶 또한 고통이지 않을까.
요즘은 어딜 돌아다녀도 어릴 적 생각이 자주 난다. 며칠 전 큰외숙모댁 다녀오는 길에 흰 꽃이 활짝 핀 나무를 보면서도 그랬다. 어린 시절 내가 가는 곳은 어디나 흙과 나무가 가득했다. 집 앞 개천을 건너면 산 아래까지 논이 가득했고 산은 또 밭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마을에는 당산나무가 둘러보는 이곳저곳에 큰 나무가 있고, 어떤 집은 나무를 피해서 돌담을 쌓아놓았다. 우리 집은 마당 한가득 나무가 가득했고 우리가 자주 뛰어놀던 성당 놀이터는 사람의 손으로 잘 다듬어진 나무밭이었다.
어린시절 어느 늦봄, 성당 근처 산길에서 벌집을 공격하는 말벌을 본 적이 있었는데 우리가 발견했을 때도 이미 땅에는 꿀벌의 시체가 수북했고 꿀벌들은 여전히 말벌을 물리치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늦가을 그 벌통 근처를 지날 때 여전히 꿀벌들이 돌아다녔던 것을 보면 끝내 말벌을 물리쳤던 것 같다.
꽃이 만개했던 늦봄에는 꽃들 사이에서 눈에 띄게 다른 색이었던 벌집을 쉽게 발견했지만, 가을날에는 울창한 잎사귀들 사이에서는 발견하기가 영 쉽지 않았다. 무심코 건드렸던 무언가 때문에 놀라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 벌들이 아니었다면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 겨울이었다면 휑한 나무에 붙어있는 벌집을 쉽게 발견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때 나는 나무의 변신이 새삼스럽게 하루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려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겨우내 기운을 추슬러 봄에 꽃을 피우고 여름에 한참 푸름을 과시하다 가을에 과실과 나뭇잎을 정리하고 다시 겨울에 쉬는 모습과 잠에서 일어나 정신을 차리고 열심히 활동하고 잠자리를 정돈하고 잠드는 모습이 닮아 보였다.
몇 년 전에 읽은 ‘지복의 성자’라는 소설에서 한 등장인물을 두고 나무에 빗대며 이렇게 소개한다. “어떤 꼬마가 돌을 던졌는지 돌아보지도 않았고, 자신의 나무껍질에 새겨진 욕을 읽으려고 목을 길게 빼지도 않았다. 사람들이 그녀를 서커스 없는 광대, 궁전 없는 여왕이라고 헐뜯을 때도 그 상처가 그녀의 가지들 사이로 산들바람처럼 불어가게 했고, 살랑거리는 잎사귀들의 음악을 고통을 달래주는 진통제로 삼았다”
나무라는 같은 소재를 두고도 이렇게 감상이 다르다. 백 명에게 물어봐도 백 가지의 다른 감상을 말할 것이다. ‘지복의 성자’ 작가는 나무의 외롭고 무정한 부분을 보았고 나는 사람의 삶과 닮은 부분을 보았을 뿐이다. 위 소설에서처럼 갈등이 던져대는 인간관계의 상처를 “가지들 사이로 산들바람처럼” 흘려보내는 것은 도대체 쉬운 일이 아닌데 나무는 일상적으로 그러하고 있다니. 그리고 그런 나무 같은 사람이라니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기에 인간관계를 모두 부정하고 반응하지 않는 것일까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는다. 봄에 꽃을 피우고 여름에 열매를 키우고 가을에 낙엽을 흘려내고 겨울에 봄을 그리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처럼, 인간관계에서 웃고 감동하고 공감하고 슬퍼하고 화내고 두려워하는 모든 감정 또한 자연스러운 것이다.
나무도 온갖 갈등을 겪는다. 겨울의 혹독함을 인내하고 봄여름의 수많은 병충해와 싸우고 주변의 나무와 햇빛을 두고 다투듯 뻗어 나가고 물길을 다투며 뿌리를 뻗어 나간다. 하지만 적당히 가지와 뿌리를 뻗고 서로 얽히면서 삶을 영위하는 모습은 영락없이 사람과 다를 바가 없다. 불면증에 고통받던 아랫집 아주머니도 인간관계의 갈등이 두려워 우리에게 말해야 할까 몇 날 며칠을 고민했을 것이다. 뉴스에서 층간소음에서 비롯하는 이웃갈등을 심도 있게 다루지 않는가. 하지만 우리에게 솔직하게 고백하고 도움을 요청하면서 내면의 갈등은 “산들바람처럼” 지나가서 조금은 잠드는데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