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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금석 전남대학교 사학과 강사 |
놀랍게도 벌써 서리가 내렸다. 이때쯤, 이슬과 다르게 서리가 맺힌다. 새벽과 낮 기온의 차이로 생긴 수증기는 낮은 새벽 온도로 하얀 결정체가 된다. 수분을 머금고 생긴 안개나 이슬과는 다르다. 10월의 낮 기온이 아무리 올라가도 새벽 기온이 차가우면 그 수증기는 지표면에 사르르 내려앉아 얼어붙는다. 추수철 차디찬 서리는 곡식에 좋을 일은 아니다. 추수철 서리는 사람들에게 부지런을 알리는 신호와 같다. 그래서 이 신호를 보고 사람들은 바쁘다. 서리 맞은 곡식조차 거두지 못하면 겨울을 버티기 힘들다. 계절의 순환은 반복적으로 혹독한 시절을 예고해 왔다. 상강은 계절의 변화를 지상에 달라붙은 하얀 서리로 보여줌으로써 역동성을 요구한다. 상강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지구는 태양을 중심으로 타원 운동 중이다. 거기에 23.5도 기울어져 자전하면서 공전한다. 이 때문에 북위 38도를 중심에 둔 한반도는 사계절을 경험할 수 있었다. 중학교 시절로 돌아가 과학 교과서처럼 전구 빛을 태양으로 간주해 보자. 기울어져 도는 지구본에 전구 빛을 비추면 지구본의 자전에 따라 빛이 비치는 면적이 달라진다. 비스듬히 기울어진 둥근 지구본을 돌리면 38도에 위치한 한반도에 사계절이 생긴다. 계절이 지나면서 자전에 따라 밤낮의 길이가 다르고, 공전을 통해 계절의 온도 차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어른이 된 뒤, 사계절의 길이가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봄과 가을의 길이가 너무 짧다.
추석은 추수 감사절이 아니다. 추석은 음력 8월 15일로 대부분 양력 9월에 위치한다. 대보름과 조상 숭배 사상에서 비롯된 추석이 마치 추수 감사절과 같이 생각된 것은 먹고 살기 힘들었던 시절에 윤달이 맛보게 해준 10월 추석 때를 간혹 반복적으로 경험하면서부터였다. 풍부한 10월 추석 수확에 대한 그 기억은 머리에 박혔을 것이다. 추수는 24절기인 태양력에 따른다.
이에 반해 추석은 음력 절기이므로 가을 수확과는 애초 아무런 관련이 없다. 추수는 상강 전에 이루어지고 입동을 전후해 마무리된다. 추수 감사절은 추수가 끝난 뒤 겨울로 들어가는 길목에 자리 잡고 있다. 상강 지나면 입동이다.
아주 옛날 사람들에게 가을 수확 마치면 한 해는 끝이다. 달력의 끝이다. 겨울은 폐색 짙은 시절이었다. 생산 주기 시간은 멈춘다. 사람들은 겨울 움막으로 칩거에 들어갔다. 최대한 에너지를 줄였다. 그들이 움막에서 나올 때쯤이면, 저장해 놓은 것들이 거의 떨어졌을 것이다. 겨울철 수렵과 채집은 고단했다. 춥고 배고픈 시절, 오로지 생존을 위한 버팀 뿐이었다.
다음 해를 기약할 수 없는 어두운 긴 터널 같은 겨울철에 유독 고대 축제가 많았다. 부여의 영고와 고구려의 동맹 그리고 동예의 무천은 모두 추수 마친 뒤, 겨울을 이겨내기 위한 제천의식이자 축제였다. 겨울 축제는 동서양을 막론한다. 역설적으로 겨울철 축제는 생기를 끄집어내고, 삶과 시간을 잇게 했다. 척박한 땅 유목민들이 겨울을 이겨내기 위한 특별한 방편은 아이러니하게도 전쟁이었다. 그들의 전쟁은 한해의 유목을 마치고 거의 겨울철에 이뤄졌다. 겨울철에 함께 죽느니, 강한 놈만 살아남아 유목 제국을 만들었다.
고려사 달력(선명력)편에 ‘상강은 (음력) 9월 중기이며, 초후에 승냥이가 짐승을 잡아 제사 지낸다. 차후에 초목의 잎이 누렇게 돼 떨어진다. 말후에는 벌레들이 다 동면할 자리로 들어간다’고 했다. 절기 15일 사이에 이와 같은 변화가 관찰됐다. 승냥이가 잡은 짐승으로 제사 지낸다고 한 것을 보면 먹을 음식을 늘어놓고 저장했음을 알 수 있다. 초목의 잎이 누렇게 된 것은 단풍을 보고 적었다. 벌레들도 여름에 짝을 찾았으니 소명을 다했다.
상강을 전후해 가을 국화 축제가 열린다. 화려하지 않지만 사군자의 하나로 귀하게 여기며 관상용으로 키웠다. 사군자의 공통점은 꼿꼿함일 것이다. 국화는 서리 맞고도 아름답다. 국화차는 별미이다. 그 잎사귀는 이쁜 화전으로도 부쳐 먹었다. 국화의 유래에 대해 중국에서 왔는지 혹은 자생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국화 애호국인 중국과의 교류로 봤을 때, 우리도 일찍부터 국화를 사랑했을 것이다. 국화의 꽃말도 색깔별로 다양하다. 가을철 들국화의 꽃말이 이쁘다. ‘진실과 감사’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