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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다정 광주청년유니온 위원장 |
그러나 지금은 혼자 일하고 혼자 책임지는 사회가 도래했다. 심지어 고용 또한 스스로 하게 된다. 일감을 얻기 위해 플랫폼에 이력을 등록하고 선택되길 기다리는 사람들, 자유롭게 일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채용 과정부터 일감을 주는 사람, 혹은 플랫폼 기업에 종속됐다.
노동의 주체성 또한 동시에 사라진다. 자연스레 누군가와 접촉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낀다. 사람은 집 다음으로 일터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다. 노동시간이 긴 한국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사회를 경험할 기회가 현저히 부족하며 300인 이상의 사업장과 같은 양질의 일자리가 아니면 일터가 주는 공동체성, 사회성을 느끼기도 어렵다. 노동법 바깥의 노동자들은 공동체도 박탈당한다. ‘곁의 힘’이 부족하다. 그리고 그것은 청년일수록, 비정형 노동자일수록 더 강하게 드러난다. 온라인을 활용해 편리하게 구직이 가능한 것은 좋지만 플랫폼 비즈니스를 넓혀주게 되면서 기업들은 거대한 빅데이터를 가져가고 축적한다. 데이터를 바탕으로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큰 이윤을 얻는데 정작 그 안에 접속해 일하는 사람들은 일터의 다양한 부조리와 사건·사고에 대응조차 할 수 없다. 존재하지만 접촉하지 않은, 접속하지만 접촉은 하지 않는 것이다.
프리랜서로 일하면서 가장 필요한 게 뭐냐고 물었던 질문에 프리랜서 조합원들은 ‘대출이라도 이자 낮고 안정적인 걸로 받고 싶어요’, ‘명절 선물 한번 받아보고 싶어요. 나도 이 사업장의 일원이라는 존중 그런 게 필요한 것 같아요’라고 답했다. 많은 건 바라지도 않는다며 시작했던 이야기는 일터의 불안정이 어떻게 고스란히 삶의 불안정으로 이어지는지 확인했던 순간이기도 했다. 우리는 다시 고민하고 상상했다. ‘곁의 힘’이 돼줄 수 있는 상호부조 조직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한국사회 역사상 최초의 노동단체는 조선노동공제회 였다. 가장 일반적인 결사체가 노동조합인 현재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왜 노동자들의 단체가 노동조합이 아닌 공제회였을까 당시 일제 치하 생존권을 위협받던 노동자·농민들이 권리 신장과 함께 일제 지배에 거부하는 투쟁을 전개한 민족 운동 단체로서의 성격을 지녔다. 노동자 결사체로서의 쟁의 활동 등과 더해 소비조합상점을 설치해 노동자에게 식량과 생필품을 제공해주는 식으로 수탈에 저항하는 등 일종의 협동조합 기능도 했다고 볼 수 있다.
특히나 전국 각지에 지회가 결성돼 회원 규모가 1만5000여명에 이르기도 했다. 노동단체로 결성됐으나 농민의 소작쟁의 등 농민운동을 지원하고 소작조합을 결성하는 등 당시 일제강점기라는 특수한 상황과 맞물려 그에 파생되는 다양한 사회적 현안에 맞섰다.
해방 이후, 독재정권 아래 한국 노동운동은 노동조합운동으로 보편화되면 노동조합이 가장 일반적인 결사체가 됐으나 최근 공제회 운동은 전국 각지에서 다시 일어나고 있다.
개별화되는 노동자들과 근로기준법 바깥의 노동자들은 기존의 방식으로 담아내기 어렵다. 여기에 더해 시대의 변화에 따라 새롭게 등장하는 일터 문제들은 이제 삶터의 문제로까지 이어진다.
공제회는 여러 사람의 신용과 신뢰를 바탕으로 운영되며 개별로 공제 된 돈을 모아 각종 생활문제로부터 구제한다. 비록 같은 직장에 다니지 않아도, 혼자 일해도, 내 곁의 든든한 힘이 되어주는 것. 그것이 우리가 상상하는 다음 노동운동의 모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