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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세일즈맨의 죽음’에서 윌리 로먼 역을 맡은 박근형 배우[(유)쇼앤텔플레이, (주)T2N 미디어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연합뉴스 |
연기 경력 60년이 넘는 배우 박근형(85)에게 앞으로 더 해보고 싶은 배역이 있느냐고 묻자 이런 답이 돌아왔다. 6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수많은 배역을 맡았지만 그는 익숙한 역할이 아닌, 아직도 해보지 못한 역할을 찾아 도전을 꿈꾸고 있다.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에서 주인공 윌리 로먼 역을 열연 중인 박근형을 최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만나 배우로서의 삶과 연기에 대한 가치관을 들어봤다.
지난 7일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개막한 ‘세일즈맨의 죽음’은 극작가 아서 밀러의 작품으로 1949년 브로드웨이에서 초연한 뒤 수많은 상을 받으며 작품성을 인정받은 고전이다. 미국 대공황기 평생 일해온 직장을 잃고 가정에서도 아들과 갈등을 겪는 세일즈맨 윌리의 비극적인 말년을 그린다.
주로 TV와 영화에서 활동해 왔던 박근형은 2023년 이 작품으로 7년 만에 무대로 돌아와 화제가 됐다.
늘 새로운 역할에 도전하고 싶다는 그는 2년 만에 다시 공연하는 ‘세일즈맨의 죽음’에서도 윌리 역을 맡아 그때와는 또 다르게 해석하려고 노력했다.
“뭐든지 다르게 하고 싶어요. 이번에는 좀 더 사실적이고 다양성 있게 접근하려고 했죠. 2023년 공연 때는 급하게 준비하느라 한 달 정도밖에 연습할 시간이 없어서 놓친 게 많았거든요. 그때는 윌리 위주로만 표현했다면 이번에는 다른 인물들이 뚜렷하게 드러날 수 있도록 했죠. 초연 때는 ‘왈칵’하는 자기 위주 연기를 했다면 이번엔 다른 배역들과 반응을 주고받고 조화를 이루며 모든 역할이 살아나게 하려고 했어요.”
드라마의 ‘회장님 전문 배우’로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의 밑바탕에는 연기 초년 시절 7년여간 연극판에서 탄탄하게 다진 실력이 깔려 있었다. 극작가 이근삼은 당시 한 일간지에 대학생 배우들을 소개하는 글에서 ‘고대(고려대) 여운계, 중대(중앙대) 박근형’을 꼽기도 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연극반 생활을 한 그는 고교 졸업 후 배우전문학교에 다니며 연극 단체를 만들고 원각사에서 공연했다. 1959년 중앙대 연극영화과에 진학한 뒤에는 배우가 힘들어서 연기가 아닌 연출을 하려고도 했지만 대학에서 공연한 ‘베니스의 상인’에서 샤일록 역을 맡은 것을 계기로 다시 배우의 길로 접어들었다. 국립극단 단원으로도 활동하는 등 연극을 계속하다 영상 매체 출연이 잦아지며 오랫동안 무대를 떠나 있었다.
“연극 하는 동안 원형 무대부터 1인극, 살롱 드라마도 해봤고 대극장, 소극장 무대에도 다 섰어요. 표현주의 연극, 인상주의 연극, 반(反)연극(독창적인 해석과 실험으로 전통 연극과는 다른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연극) 등 다양하게 했죠. 여러 장르를 해봤기 때문에 작품 해석력도 상당히 높아졌죠. 7년간 경험한 게 (이후 연기하는데) 보물 같은 시간이었어요.”
최근에는 80대 중반의 나이가 무색하게 왕성하게 무대에 서고 있다. ‘세일즈맨의 죽음’에선 매번 3시간 가까운 공연을 소화하고 있고 2023년 12월 신구, 박정자, 김학철 배우와 함께한 ‘고도를 기다리며’는 79회 연속 매진이라는 기록을 세우며 흥행했다.
“올해는 연극에 묻혀 살아야 할 것 같다”는 그의 말대로 올해도 공연 계획이 빽빽하다. 3월 3일까지 ‘세일즈맨의 죽음’ 서울 공연을 마친 뒤 4월까지 인천, 전주, 수원, 용인, 대구, 부산에서 공연을 이어간다.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도 다시 무대에 오른다. 예수정, 장용 배우와 함께 한 영화 ‘사람과 고기’도 올해 개봉을 앞두고 있다.
박근형은 “연극을 자주 할 생각”이라고 했지만 20년 만의 무대 복귀작이었던 2012년 ‘3월의 눈’ 이후 그가 출연한 연극은 2016년 ‘아버지’와 ‘세일즈맨의 죽음’, ‘고도를 기다리며’ 정도에 그쳤다. 작품을 고르는 데 있어 그만의 명확한 기준이 있기 때문이다.
“정통 작품을 하고 싶고 되도록 국내에서 초연하는 작품이면 좋겠어요. 특히 창작극을 하고 싶어요. 그리고 스케일이 컸으면 좋겠어요. 여러 사람이 나와서 갈등 요소도 많고 여러 생각을 펼쳐 나가야 보는 재미가 있지 않나요. ‘맹진사댁 경사’나 차범석 선생의 ‘산불’ 같은 작품을 개작하는 것도 좋죠.”
그는 “우리나라는 희곡 문학이 너무 뒤처져 있다”며 “노벨문학상까지 받은 나라이고 전쟁과 가난 같은 걸 다 겪은 나라인데 왜 (좋은) 희곡이 없는지 모르겠다. 배우 출신인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에게 창작극 현상 공모를 해달라고 당부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연합뉴스@yna.co.kr